걷는 동안, 나는 나를 배웠다
지리산을 내려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몸 안에는 산의 공기가 머물러 있다.
눈을 감으면
운무 속 천왕봉이 떠오르고,
비 내리던 세석의 냄새가 다시 코끝에 맴돈다.
길을 걸을 땐 몰랐다.
이 시간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을.
이제야 조금 알겠다.
지리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었다는 걸.
화엄사에서 시작된 여정.
비를 맞으며 오르던 연화천의 길,
새벽어둠 속에서의 결심,
그리고 장터목의 고요한 아침.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이상할 만큼 단단해졌다.
누군가는 말한다.
“산에 오르면 내려와야 하잖아요.
그럼 왜 또 오르세요?”
이제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산에 오르면, 내가 보여요.”
비에 젖은 옷처럼
세상의 무게가 내 어깨에 붙어 있을 때,
나는 다시 산을 떠올린다.
무겁지만 괜찮았던 그 순간들,
두렵지만 나아갔던 발걸음들.
그게 삶이라는 걸
지리산이 가르쳐줬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또다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그 단순한 진리를
몸으로 배운 시간이었다.
사람들도 남았다.
비 오는 날 수제비를 나누어주던 사람들,
새벽에 길을 밝혀주던 헤드랜턴의 불빛들,
그리고 장터목에서 우연히 만난 반가운 얼굴.
그들은 스쳐갔지만,
그들의 온기는 오래 남았다.
길 위의 인연은
늘 그렇게 조용히, 깊게 스며든다.
지리산이 내게 남긴 건
거창한 감동이 아니다.
그저 단단한 일상,
그리고 ‘괜찮아’라는 한마디의 용기다.
산은 내게 말했다.
“멈춰도 괜찮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
그 말이
요즘 내 삶의 속도가 되었다.
이제 나는 안다.
길은 걷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지리산은 내게
새로운 나를 보여준 스승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길 위에서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