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무심히 켜본 화면 속에서
뜻밖의 문장이, 뜻밖의 사람이
내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오랜만에 넷플릭스를 열었다.
몇 달 동안 산과 길에서 계절을 따라 걷느라
집 안의 작은 취미들은 한동안 뒤로 밀려 있었다.
‘매달 회비는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 생각 하나로 들어간 자리에서
나는 뜻밖의 이야기와 마주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별 기대 없이 틀었던 드라마는
어느 순간 나를 완전히 잡아끌었다.
울컥하고, 공감되고,
마음 한편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의 돌이
툭— 하고 굴러내리는 느낌.
그러는 사이 새벽 네 시,
그리고 다섯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휴무일에는 금정산을 오르려 했는데
그 계획은 그대로 멈췄다.
그만큼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세게 흔들었다.
8회까지 단숨에 보고 나서
9회 공개 날짜까지 메모해 두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이 작품이 웹툰이자 소설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건
드라마 속 송 과장 캐릭터가
작가 자신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작가는 젊었다.
하지만 그의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매일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첫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고,
회사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하기 전 한 시간 동안 블로그에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늘 책을 읽었다고.
이 드라마와 원작은
그렇게 쌓아 올린 그의 문장들이 모여 탄생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 성실함 앞에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꾸준함은 결국 삶을 새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드라마 속 김 부장은
겉보기엔 모든 걸 갖춘 사람이다.
서울 자가, 대기업, 안정된 경력.
하지만 25년의 시간이
갑작스러운 좌천과 실망으로 무너지며
그는 본사 복귀를 꿈꾸다가
결국 재기의 길을 놓치고 만다.
퇴직 이후엔 상가 사기로 퇴직금을 잃고
대출에 짓눌려 흔들리는 모습까지 그려진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질 이야기는
아마 좌절이 아니라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 일 것이다.
가족과 충돌하며 성장하고,
명함 밖의 삶을 배워가는 과정.
드라마를 보면서
나 역시 그 질문을 떠올렸다.
“직함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퇴직을 앞둔 나는
몇 달 전부터 그 질문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굴려보고 있다.
내려놓는 법을 연습하고,
다시 나로 서는 법을 생각하며
소비 패턴과 삶의 속도를
조금씩 나에게 맞게 조절해 보는 중이다.
김 부장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실패 기록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드라마는 나에게
단순한 재미를 넘어
묵직한 질문 하나를 남겼다.
“이제,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