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조용히, 빗속 나뭇잎처럼 스며들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
얼마 전, 동화사에서 눈과 벚꽃이 함께했던 그 신기한 날과는 또 다른 풍경이다.
비는 나뭇잎을 적시고, 조용히 내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봄비는 이렇게, 말없이 모든 것을 적신다. 향일암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가랑비가 조금싹 내렸다.
나무들이 부드럽게 흠뻑 젖어 있었고 지난밤 내린 빗줄기와 초록의 잎들이 어울려 참 신비로운 그림이 되었다.
그 순간, 오래된 기억 하나가 물결처럼 떠올랐다
서른 해 전이었다. 아직 서넛 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들과 남편, 여수에 사는 친척 언니 부부와 함께 이곳을 찾았었다. 그때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잡고 향일암 돌계단을 함께 오르던 그날의 시간이 스쳤다.
길이 가파르다며 투정을 부리다가도, 꽃을 보면 또 환하게 웃던 아이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그때는 힘든지도 몰랐고 지금보다 더 웃음이 많았던 것 같다 시간이란 건 그렇게 흐르고, 그 자리엔 기억만이 남는다.
묘하게, 향일암의 해탈문을 지나가며, 남편과 함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는데. 아들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
화면 속 손녀가 혼자 걷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젠 손을 안 잡아도 잘 걸어요.” 하고 웃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손을 꼭 잡고 걷던 아이가 어느새 아빠가 되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켠이 조용히 젖어들었다.
기쁨과 아련함이 겹쳐지는 묘한 감정. 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 뒤집고 기고 서고 이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여러 감정들로 향일암에서 내려오는 길, 비에 젖은 나뭇잎이 햇살보다 더 반짝였다.
그 반짝임 속에는
오래전 어린 아들의 손길,
지금의 손녀,
그리고 나의 삶이 고요히 깃들어 있었다.
오늘의 비는 내게 시간을 선물했다.스쳐간 기억, 흐른 세월, 그리고 여전히 흐르고 있는 지금.
이 모든 것이 비에 스며들어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