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The Dart Fields를 원작으로 한 영화인 '리미트리스(Limitles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스타 이즈 본'영화에서 레이디 가가(Lady Gaga)와 공동으로 출연했던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가 에디 모라 역할의 주연이고,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가 조연으로 나왔던 영화로 최근에 다시 봐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뇌의 기능을 깨워 100% 가동을 시킬 수 있게 만드는 약을 접한 삼류 작가가 변해가며 헤지펀드 매니저, 상원의원과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으로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꿔 버린 해피앤딩의 내용입니다.
영화의 중반에서 주인공인 에디가 뇌의 기능을 풀가동시켜주던 약이 떨어졌을 때에 부작용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의 창백한 얼굴에 쾡한 눈동자와 필름도 잠시 끊어지고 끝이 어딘지 모를 곳에 가서 겨우 정신을 차린 후에야 다리를 절룩거리며 집으로 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쓰고 난 후에 밀려오는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함의 모습이 그러하리라 짐작이 갔습니다. 영화는 아니더라도 가끔 에너지 음료를 마시고 나면 정신이 바짝 들어 집중력이 높아졌다가 효과가 떨어지면 피로감이 급 밀려오는 것과 비슷한 느낌.
번아웃도 이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번아웃은 1974년 정신과 의사인 하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에 의해 과로의 결과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붕괴를 겪는 환자들에게 처음 진단되었습니다. 이런 번아웃은 2019년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에 번아웃 증후군을 직업과 관련된 문제 현상으로 분류를 할 정도로 아직 질병으로 정의된 것은 아니지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것이고, 최근 우리 주변에서도 일중독이나 슬럼프를 넘어 이러한 증상을 번아웃으로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번아웃과 탈진(exhaustion)은 체력적이나 정신적으로 관련이 있긴 하지만 다른 범주에 속합니다. 탈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는 걸 의미한다면 번아웃은 그 지점에서 며칠, 몇 주, 또는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더 나아가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번아웃의 한 복판에서는 업무가 끝나면 뒤따르기 마련인 성취감은 영영 찾아오지 않습니다. 번아웃은 잠을 충분히 자고, 휴가를 써도 진정으로 털어버릴 수 없는 무딘 탈진의 감각으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아주 사소한 사건(지하철이나 버스를 놓치거나, TV 드라마를 보다가, 교통 체증이 갑자기 심해지거나, 온수가 제대로 안 나오거나, 윗 집에서 쿵쿵 소리가 들리는 등)이 발단이 되어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미국 <뉴욕 타임스>의 기고가이자 온라인 미디어 <버즈피드>의 수석 작가인 앤 헬렌 피터슨(Anne Helen Petersen)이 쓴 《요즘 애들(원재: Can't Even:How Millennials Became the Burnout Generation)》책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의 사람들이 번아웃 증상을 제일 예리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책에 나온 내용을 보면 특정 세대에 해당하기보다 작금의 시대에서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으로 와 다았습니다.
책에서는 번아웃과 관련하여 다양한 관점의 내용들이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예로 든다면, 밀레니얼 세대는 이제 첫 직장을 구하던 시기를 지나(1981년 최연장 밀레니얼은 42세)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 직장에선 임금 상한선에 직면해 있습니다.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가면서 자녀를 위한 저축 방법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하늘 높이 치솟는 집값과 양육비, 의료보험료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로 합니다. 체계적으로 살아보려 아무리 열심히 애를 써도, 이미 빠듯한 살림살이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려 노력해도, 성년기에 주어지리라 기약했던 안정은 찾아올 기미조차 없습니다.
직업과 일의 선택 조건으로 안정적이고, 연봉이 괜찮으며, 번듯한 직업으로 인식되어서 부모님들이 만족해하는 동시에 멋진 회사에 근무한다고 비슷한 또래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며, 유년기에 겪은 모든 최적화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정을 느끼는 일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더 나은 인생을 산다는 목표'도 만족시키는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는 논리의 가정 하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모두가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로 우리는 열정을 쏟고, 멋진 직업을 욕망하는 마음은 모든 형태의 착취를 견디게끔 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평생 단 하루도 일을 하지 않게 된다"라는 말들은 번아웃으로 빠지는 덫과 같은 말이며,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것이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말 그대로 느낌적인 느낌일 뿐 일은 일인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 뒤의 노동은 사라질 뿐 아니라, 그 덕분에 일하는 사람의 능력과 성공, 행복과 금전적인 이득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방정식은 애초에 번아웃으로 가는 직행 열차인 일과 삶의 통합을 전제로 합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고, 일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됩니다.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 혹은 일하는 자아와 진짜 자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일에 쏟아붓습니다. 적어도 오늘날 "좋아할 수 있는" 일은 눈에 띄는 직업(연예인, 유튜버, 스타트업 CEO 등), 자영업이거나 직속 상사의 감독을 적게 받는 직업일 수도 있고, 사회에서 이타적으로 간주되는 직업인 교사, 의사, 복지사 등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멋지게 묘사되는 직업(큐레이터, 강사, 탐방가 등)일 수도 있고, 언제 어떤 일을 할지 완전히 자율적으로 정하는 게 가능한 직업인 프리랜서일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 열정을 좇는 것이 어떻게 비끗해서 과로로 이어지는지 역사적으로 추적을 해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캘리포니아 산타글라라밸리의 방위산업 업계에 있었던 고용 관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50년대 방산업계 회사들은 외골수처럼 느껴지지만, 어떤 특정한 영역에 대해서는 탁월하게 집중할 수 있는 과학자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렇게 고용된 과학자들에게 일은 그냥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일에 바쳤고, 보통은 그러느라 인간관계, 운동, 수면, 식사 등도 내팽개쳤습니다. 훗날 실리콘밸리에 있던 록히드에서는 이러한 직원들을 모델로 직장 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원하는 만큼, 몇 시간이든, 얼마나 오래든, 어떤 옷차림으로든 일해라. 그러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HP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식사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도록 아침 식사를 배달해 줬습니다. 이는 오늘날 IT분야 및 스타트업 문화의 특징인 카페테리아와 무료 식사, 무료 간식, 무료 음료의 초기 버전입니다.
과로 문화의 대표적인 또 하나의 예는 컨설턴트입니다. 유명한 글로벌 컨설팅 업체의 내부 문건에 실린 표현을 들자면 컨설턴트는 "실적과 성격을 기반으로, 당사에서 장기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는지"에 따라 평가되었습니다. 이는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도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컨설팅 회사에서 주기적으로 직원들을 교체하는 일은 워낙 흔해서 퇴사 이력이 약점으로 간주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근무를 하다가 퇴사를 한 사람들은 빠르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이전에 그들이 자문했던 회사에 채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점점 전직 컨설턴트가 기업계로 퍼져나가며 어떻게든 단기 이익을 내야 하고, 불안정하고 고임금이라는 컨설팅 업계의 특성이 기업의 문화로 보편화되었습니다.
직원들 간의 유대 관계도 약해지며 좋아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고 쟁취한다는 목표 아래 경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후 회사의 입장에서는 개인이 일에 대해 열정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을 직원들의 근무 조건보다 우선시하게 되었습니다. 과로 문화가 생산성 있는 결과를 내놓는 건 아닙니다. 번아웃은 그러한 문화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찾아옵니다. "이게 뭐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금전적인 측면을 포함해 성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찾아옵니다.
일중독. 좀 더 멋진 말로 워커홀릭으로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기억하는 내 모습 중 하나는 밤늦게 팀 회식을 마치고 집 근처에 와서 택시비가 없으니 택시비 좀 들고 나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택시가 정차해 있는 곳으로 나왔을 때였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노트북이며 서류를 잔뜩 넣은 가방을 품에 안고 길 한 귀퉁이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언제 그랬냐며 잡아 땐 적이 있습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평일 저녁이고, 주말이고 간에 회사 일 좀 잘해보려고 항시 붙들고 있었을 때... 물론 좋은 성과도 있었고, 인정도 받았고, 개인적으로 성취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큰 아이가 대여섯 살 무렵쯤이었을 것입니다. 엄마랑 아이랑 같이 자려고 옆에 슬며시 누웠을 때 아이가 내 옆구리를 발로 툭 밀며 "나가서 공부해"라고 했습니다. 아이한테 저는 늘 그랬습니다. "아빠는 공부해야 하니까, 엄마랑 먼저 자~" 그러면서 따로 나와 밤늦게 까지도 업무 관련된 서류를 뒤적였던 모습을 보고 아이가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순간 이게 뭔 일인지 정신이 멍 하더군요.
학창 시절에 공부 덜하고 놀았으니,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르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따라가기 위해선 남들보다 더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뒤늦게라도 공부도 시작했고, 일 도 더 하려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맘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너무 무리하진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나도 물론 소중한 존재이지만, 무엇보다 함께하는 가족들도 소중하니까요. 함께 좋은 추억과 경험을 계속 쌓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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