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한테 고백하게?
때는 군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2000년 여름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주말, 쉬고 있는데 내 동기 J가 나에게 왔다.
딱히 군대라는 것이 쉬는 시간에는 할 게 그다지 많지 않다.
게다가 말년 병장이 아니던가!!
당시 '묵향'이라는 퓨전 무협 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얻던 시기이고 때마침 내 차례가 돼서 신나게 책을 읽고 있는데 나를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묵향'은 상병 때 군대 내에서 금지서가 됐던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선임들이 잠을 안 자고 이 책을 읽고 있었으니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정신 나갈 것 같은 스토리로 무협과 판타지를 버무린 그런 소설이었다.
"아~ 왜?"
아무 말없이 쳐다보던 그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를 수 있는 근사한 곡 없을까?"
이 친구는 당시 군대 내 있던 교회에서 나랑 같이 베이스와 피아노로 수요일과 일요일에 찬양단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중고등부 시절부터 오랫동안 피아노로 찬양단을 해왔던 친구라 피아노를 굉장히 잘 치던 친구였다.
하지만 이 녀석의 질문이 좀 의아했던 게 피아노 꽤나 쳤으면 적어도 나보다는 더 많은 음악을 알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도 중고등부에서 베이스로 찬양단을 할 때 청년부에서 피아노 치던 대학생 누나들 대부분이 클래식을 굉장히 잘 알기도 했고 한 누나는 전통 재즈는 아니더라도 퓨전 재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피아노 치는 분들은 대부분 음악에 상당히 전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나는 깊이보다는 얇은 잡지식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니가 더 잘 알겠지"
"너도 피아노 쳤다며? 혹시 그런 곡 없을까?"
"피아노 안친 지가 언젠데? 그런 곡이 있으면 나한테 좀 알려줘 봐라"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했다.
가요나 팝송 심지어 락같은 곡도 피아노 치면서 부를 수 있는 근사한 곡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왜 나한테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락의 경우에는 중고등 시절 빽판으로 듣던 X-Japan의 'Tears'같은 곡이 딱 떠오르네?
다나카의 'Endless Rain' 아.. 아니 와스레나이?
같은 시기에 이 친구를 비롯해 동기들과 군대를 장식할 마지막 휴가를 동시에 나왔다.
그리고 서울에서 사는 동기들하고는 홍대에서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나에게 하얀 핸드폰을 주시면서,
"이제 곧 제대인데 휴가동안 이 핸드폰을 사용해. 이제 이 핸드폰은 니거야"
휴가 복귀하고 이틀만 지나면 제대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핸드폰을 미리 준비해 주셨다.
나는 그다음 날 홍대 KFC앞에서 동기들끼리 만나서 술 한잔도 하고 다들 제대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 J는 며칠 전 나에게 했던 질문을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던졌다.
너 재즈 좋아한다며?
고백송으로 니가 아는 재즈곡 하나만 내놔봐라!
결국 그날 아버지가 주신 핸드폰 번호를 그 친구에게 주고 나에게 연락하면 내가 좀 찾아볼게라는 말만 하고 그렇게 동기들과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눈을 떠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어머니는 집사님들과 만남이 있으시다면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과 김치찌개를 맛나게 끓여주시고 외출을 하셨다.
점심을 먹으면서 오늘 뭐 할까 고민하는 순간 설레게도 내 핸드폰에 첫 알림이 울렸다.
왜 설렜던 것일까?
하지만 내 동기 J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로맨틱한 곡이라고 생각했던 몇 개의 곡을 던졌다.
전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나마 천리안에서 얻어들었던 Chet Baker의 'I Fall In Love Too Easily'나 'What A Diff’rence A Day Made'같은 곡들을 포함해 'Misty', 'My One And Only Love'같은 곡들을 그냥 막 던졌던 거 같다.
일단 가사는 모르겠고 그냥 분위기로 조져버리라는 얘기를 하면서 말이다.
그랬더니 ,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Sting이 부른 곡이 'My One And Only Love'아니냐? 이게 재즈곡이었어?"
"몰라. 암튼 알아서 찾아 듣고 하나 집어라."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긴 했지만 Sting이 이 곡을 불렀는지는 잘 몰랐었다.
나중에서야 Sting이 4번째 정규작 <Ten Summoner's Tales> 전까지 정규/라이브 음반에서 Branford Marsalis와 함께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여담이긴 한데 Branford Marsalis와 함께 할 당시의 밴드 멤버를 보면 지금은 고인이 된 Kenny Kirkland, Darryl Jones 등 실력파 재즈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 10일이 마치 한순간처럼 지나가고 복귀를 눈앞에 뒀다.
'거 참 시간 한번 빠르네.'
이틀만 자면 이제 민간인이 되는 말년 병장인 나는 다들 훈련을 할 때에도 마치 주위를 서성이는 하이에나처럼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고민하고 있을 때 J가 나를 PX로 끌고 갔다.
"성공적이었어!!!"
"왜 그래? 뭔 소리야? 뭐가 성공적이었다는 거야??"
내용은 이랬다.
나도 그렇고 J도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녔고 그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보다 3살 많은 어떤 누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 누나는 결국 J의 아내가 되기도 했는데 역시 찬양단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고 한다.
예전부터 누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모양이다.
그 누나는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휴가기간 내내 'My One And Only Love'를 카피하고 가사를 외워서 교회에서 그 누나한테 이 노래로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벤트를 생각했다니 넌 진짜 대다나다!!!
근데 상상이 안 가네? 교회에서 이걸 어떻게 연주했다는 거지?
"낼 군대 복귀인데 누나가 올 때까지 군대 복귀 안 하고 탈영? 교회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지. 정장을 쫙 빼입고 말야. 누나가 안 오면 어떡하나 고민도 하긴 했는데 누나가 온 거야!!!!"
"오오오"
탈영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단 말이지? 흥미진진
"그전에 의자를 뒤로 싹 다 빼고 누나가 앉을 의자 하나만 딱 남겨놨다 이거야!"
"너 영화를 너무 많이 본거 아니야?"
"암튼 그리고 'My One And Only Love'를 연주했지. 연주가 끝나고 결국 누나가 나와 사귀는 걸 허락해 줬어!!!"
허세가 진짜 속된 말로 '개쩐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때 내가 느꼈던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이런 걸 진짜로 하는 인간이 내 주위에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이 진짜인가?라는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꿔줬다는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간 나무를 수두룩하게 봤는데????
레알? 영화, 드라마,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어?????
그래 너의 그 멋진 허세 말이야!
넌 미인을 얻을 자격이 있어!
어쨌든 나는 그 녀석이 현재의 아내인 그 누나에게 부릴 수 있는 최고의 허세라고 생각했다.
가사를 보며 듣다 보면 J가 했던 이벤트가 참 로맨틱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참 후에야 영화를 다시 빌려보고 o.s.t. 를 구입해서 들었을 때는 다른 느낌을 주는 곡이다.
나도 영화처럼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를 거닐며 도박도 하고 분위기에 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제는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라스베가스를 걸으며 Sting의 'My One And Only Love'를 듣는 상상!
그래! 이게 바로 완벽한 허세이자 재즈같은 삶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