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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기쁨 Apr 18. 2024

절실하지 않은 사람

초심을 잃은 외로운 사람

처음 아기가 태어난 날을 잊을 수 없다.


아이의 탯줄을 자르던 그 떨리던 시간과 눈도 뜨지 못하는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의 그 마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자라 부모님의 마음으로만 아이를 바라보다 보니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처음 아기를 안았던 그 순간 부모의 마음이 아닌 아이의 눈으로 보고자 했던 그 마음은 어디 간 것일까?


초심을 잃은 것일까?


아이가 생기지 않아 몇 년간 병원을 다니기도 했던 그 절실함은 이제 내 옆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가 열이 나서 40도가 넘고 뛰놀기 좋아하는 그 활발한 아이가 이불속에서 엄마를 외치며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그제야 그 절실했던 마음이 다시 떠오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말 오랜 시간을 보아 온 손님 O는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제 시니어로서 가파르게 성장해 가던 O는 항상 자신만만했다.

그 열정은 같이 있는 그 순간에 나에게까지 전염이 될 정도로 뜨거운 분이었다.


솔직히 당시 나는 마케팅 관련 업무를 알지 못했다.

군제대 이후 복학을 준비하던 그 시기에다가 마케팅과는 전혀 무관한 공대생이 아니던가?


그가 나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들은 솔직히 말하면 반응해 주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

아는 게 있어야 호응을 해줄 텐데 모르기 때문에 그저 듣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 열정 에너지가 나에게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습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마치 불씨가 꺼져가듯 그의 열정도 그 불씨처럼 언제 꺼질지 모를 만큼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빠른 승진과 성공이 그에게 독이 되었을까?

아니면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대화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O가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바스키아. 내가 퇴사한 지 한 달이 돼 가는 중일세."


"퇴사요? 아니 갑자기 퇴사라니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됐다네.

사실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네.
회사에서는 내 결정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보라고 하긴 했지만...

글쎄...

일만 바라보니 내 주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좀 크더군.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열정이 다 한 게 아닌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다네.
항상 내 주위를 돌보고 동료와 함께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했지.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렇지 않았네.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한 게 뭔 줄 아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자리라는 것이 참 묘하더군.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일세.
내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나 혼자만의 열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지.

나의 열정과 동료들의 열정이 만들어낸 자리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을 때 이미 늦었더군.
성공이든 실패든 일을 향한 절실함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네.

나의 자만이 결국 그 자리가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 된 거지.
그 자리에 만족하고 자만했던 내 탓인 것을...

동료들과의 신뢰가 깨지기 시작하니 이건 뭐...
답이 없더라고.

결국 동료들이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내가 초심을 잃은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네.


"다른 사람의 평가가 중요한 건가요?"


"물론이지. 일이라는 것은 누구 하나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진행될 수 없다네. 물론 괴물 같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의 성공 여부는 협업에서 이뤄지지."


"그렇군요."


"생각해 보게. 자네와 같이 일하는 상사와의 신뢰가 깨졌을 때를 말이야. 그 반대를 생각해도 상관없네. 어쨌든 그렇다면 어느 누가 그 상사를 믿고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상사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처음에는 작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커지게 마련이니까."


"저는 저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평가와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하하. 자네는 독고다이인가? 자네의 옷차림이나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닐세. 그것은 태도의 문제라고 나는 보네. 자네가 옷을 어떻게 입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평가를 말하고 싶었네."


"아...."


"결국 일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거지.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고 보면 되네."


절실함이 없는 초심을 잃어버린 리더를 어느 누가 따를까?
그래서 퇴사를 하고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네.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중일세!



Richard Wyands - Lament (1998년 음반 Then, Here And Now)


그 이후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O는 어느 날 문득 바에 찾아왔다.


그리고는 그간의 일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치 처음 그를 만난 그 모습으로 말이다.


지금 회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에서 전에 느꼈던 열정을 보게 되었다.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는 멋진 리더로 성장하길 바라며 건배!



Storyville, 스토리빌은 원래 뉴올리언스의 홍등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후에 재즈 클럽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덴마크에서 이 이름을 따서 만든 레이블이 바로 Storyville Records이다.


국내에서도 이 레이블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많은 작품들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경우에는 이때 이 레이블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중에 하나가 바로 Richard Wyands의 <Then, Here And Now>이다.


Kenny Burrell, Oliver Nelson 같은 뮤지션들과 많은 협연을 했던 피아니스트로 사실 이 음반은 78년에 녹음되어 79년 Jazzcraft Records에서 발매된 음반으로 그의 첫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재즈 마니아들에게는 일종의 수집의 대상이 되던 음반이었다.


그러다가 이 레이블에서 리마스터링 되면서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오랜 기간 클럽에서 하우스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사이드맨으로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Hank Jones, McCoy Tyner 같은 당시의 실력파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은 연주를 보여준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크게 각광받지 못한 게 아닌가 싶지만 그가 보여준 연주에는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Label: Storyville (originally Jazzcraft Records)

Title: Then, Here And Now

Released: 1998 (originally 1979)


Richard Wyands - Piano

Lisle Atkinson - Bass

David Lee - Dru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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