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2025년 8월, 워싱턴주 핸포드 중력파 관측소 LIGO
[유민, 2025년 8월, 미국 워싱턴주 레드몬드]
CERN에서 고에너지 입자와 충돌 사고 후 어느덧 4개월이 지나간다.
지난주, 시애틀 워터프론트 공원 옆 Seattle Antiques Market에서 까마귀 의자를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분명히 1995년 여름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이수가 앉았던 그 의자였다. 특히 의자 등받이에 새겨진 삼태극 문양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의자를 다시 본 그날, 지난 4월 제네바 대학 병원에서 정석이 내게 한 말도 떠올랐었다.
“유민, 몸은 좀 어때? 나 교환 연구원 임기가 이달 말 끝나서 핸포드 중력파 관측소로 돌아간다. 너 몸 좀 괜찮아지면... 무엇이든 상의할 것이 있으면 잠깐이라도 핸포드 중력파 관측소로 한번 와”
1996년 가을, 대학 졸업 여건이 갖춰지자마자 미국 M사가 있는 시애틀로 이주를 결정했던 건... 내 경력에 너무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이수가 실종된 서울에서 지내다 보니, 지나가는 거리 만나는 수많은 장소에서 함께했던 이수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자꾸 떠오르는 게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써 잊고 지웠다고 생각했던 이수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지난주 95년 이수가 인사동에서 앉았던 의자를 다시 봤을 때, 마치 호수 밑바닥에 30년간 조용히 침잠해 있던 모든 부유물이 호수에 떨어진 바위에 놀라 일거에 수면 위에 떠오르듯, 내 마음을 흔들어놨다.
제네바 병원에서 이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새겨지는 것 같던 경험은, 사고에 따른 일시적 후유증이라 생각했고, 그 또한 바로 잊으려 애쓴 내가 아닌가... 하지만 보고 만질 수 있는 의자는 - 내 기억과 감정을 다시 흔들어 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 그 실체적 질량감이 컸다.
지난주부터 회사는 나가지 않고 있다. 본부원들에게는 재택근무라 말했지만, 집에서 하루 종일 한 건, 96년 미국 올 때 갖고 온 짐 중, 차고 한편에 쌓아 놓고 30년간 뜯지 않고 있던 상자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는 거였다. 봉인해 놓았던 이수와의 기억과 감정을 다시 마주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이수에 대한 모든 기억과 감정들이 30년 시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생경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한 박스에서 본 '이상 전집', 이 책은 낯설다. 내 책이었나? 이수 책이었나...? 이어서 떠오른 95년 7월 이수와 Mac & Jack 맥주를 마시며 나눴던 오감도 시제 4호에 대한 난상 토론, 그리고 이수가 실종 뒤 이수와 함께 갔던 장소들, 마음에 짚히는 장소들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이수를 찾던 그 여름. 그때 인사동 골동품점도 몇 차례고 들렸었지.. 그 가게 의자에 앉고 일어난 이수는 꽤 이상했었으니까. 그 의자가 지금 내게 배송되어 오고 있다... 이 기억들 때문일까? 이상 전집을 들고 서재로 온 나는 그 뒤로 이틀간 이상 전집을 정독했다. 그리고 발견한 이상 시집에 수록된 시《진단 0:1》.
'... 다음날 난 회사에 바로 병가을 냈지...'
정석이 있는 핸포드 중력파 관측소로 운전해 가는 내내 이런 상념이 줄곧 이어진다. 워싱턴주 내 사막 지역이라, 시애틀 항만의 워터프론트 공원에 비하면 차창밖 바람이 건조하다. 워싱턴 주 사막 한가운데 펼쳐진 실험 시설 주변은 묘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직장과 집이 있는 레드몬드에서 정석이 있는 핸포드까지는 3시간 남짓 걸렸다.
[유민, 2025년 8월, 미국 워싱턴주 핸포드 중력파 관측소 LIGO]
"정석아, 이걸 봐. 이상의 시집에 수록된 《진단 0:1》이란 시야."
정석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마중 나왔다가 사무실 한편 휴게실에 앉자마자 갑자기 책을 펴 들이미는 나를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쳐다본다. 이런 정석을 애써 무시하며, 난 조급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나는 프린트한 이상 시의 《진단 0:1》과 《오감도 시제 4호》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펼친다.
정석 : "봤어, 근데?"
유민 : "이 두 페이지를 반으로 접으면 정확히 겹치는 게 보여? '중첩' 된단 말이야.
중첩으로 유도하는 힌트는 더 있어 ‘이상 책임의사 이상’ 이상을 앞뒤로 썼어. 마치 한글로 만든 *palindrome 같지 않아? 마치 반으로 접어 중첩되는 현상을 보라는 지시등처럼... 반으로 접을 위치를 표시하는 똑딱이 단추처럼 말이야. 내 95년 때 지식으로는 '오감도 시제 4호'를 bit까지 상상하며 복호화했었는데, 지난 30년 지나 '진단 0:1'과 함께 다시 보니, 이상은 1,0 bit를 얘기하려고 한 게 아닌 것 같아... 1과 0, 그리고 1과 0이 중첩되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Qubit 개념을 시를 통해 우리에게 힌트 주려고 한 것 같아. 그러니 인간 언어로 시를 해석할 수 없는 시가 만들어진 거지. 마치 아주 아주 작은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자연어로 설명도 이해도 힘든 것처럼 말이야. 컴퓨터공학 입장에서 보면 마치 프로그래머가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에 *이스터 에그 심어 놓듯, 이상은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힌트를, 자기 시에 이스터에그로 심었단 생각이 들어. 근데 왜? 아니 이 시기에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지? 나 혼란스러워서 네게 온 거야. 정석아, 물리학자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
숨도 쉬지 않고 쏘아대는 내 말을 정석은 스펀지 같은 표정으로 받아준다. '니 맘 나도 안다. 그러니 내가 너에겐 이렇게 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정석을 보는데,
정석 : "너는 지금 시인 이상이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보다 50년 앞서 퀀텀 컴퓨팅 개념을 얘기했다고 얘기하는 거야. 지금 니가 무슨 말하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오감도가 1934년 발표됐다고 했지?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슈뢰딩거가 양자 역학 논쟁으로 박터지게 싸운 게 1935년이야. 그래도 서로 결론을 못 내리니까 *슈뢰딩거가 고양이 편지를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게 1935년 8월이라고.. 유민, 너 너무 멀리 간 거 같다. 제네바 CERN에서 사고 후 이수 목소리도 들었다고 하고... 너 괜찮은 거냐?"
유민 : "1995년 여름에 내가 갖고 있던 지식으로 오감도 시제 4호를 봤을 때만 해도 내 지식수준은 세상을 *이원론적 사고로 보는데 머물러 있었지... 그래서 비트(bit)까지 상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 시를 해석해서, 0과 1로만 정보를 처리하는 디지털 컴퓨터의 작동 원리, 즉 bit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했었어."
이어서 나는 95년 여름 이수와 시애틀 워터프론트 옆 골동품가게에서 오감도 시제 4호를 발견하고, 그 시를 암호화 복호화 관점에서 해석했던 일을 간략히 정석에게 설명해 주었다.
유민 : "여기까지가 95년도 내 지식과 직관으로 추론하고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
근데 지난주 이상 시집에서 '진단 0:1'을 본 후, 오감도 시제 4호와 연결해 생각해 보니, 내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지난 30년 나도 많이 바뀌기도 했고..."
정석이 묵묵히 듣자, 난 계속 이어 말한다.
유민 : "난 이상이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 구조가 bit 아닌 qubit, 즉 확률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시적 비유를 통해 표현했다고 생각해. 그는 양자 역학과 퀀텀 컴퓨팅 동작 원리를 그 당시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고.. 난 그런 생각이 들어."
정석의 표정을 다시 한번 본 후, 계속 이어 말한다.
유민 : "물론, 이러 연결은 은유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이야. 난 그래서 이상이 시의 형태로 양자 물리학 이론과 그 실질적 연산 단위인 qubit 개념을 우리에게 설명해주려고 했다면... 아니 설명하려고 한 건지 장난을 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장난을 치려고 해도 자신이 뭘 알아야 장난을 치지 않아?"
정석 : 음.. 이 정도면 일반인치곤 아주 잘 미쳤어... 물리학 학회 끝나고 물리학자들끼리 맥주집 가서 학회 본회 때는 얘기하기 어려운 ‘카더라 이론’을 난상 토론할 때 느낌이긴 하지만...
내가 정보 우주론을 연구하고 그 이론을 주장하는 물리학자이긴 한데... 너 시 해석이 너무 멀리 간 것 같아.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
유민 : "정석아, 우리가 처음 고등학교에서 만났을 때가 18살쯤이었는데, 어느덧 50살이네. 난 컴퓨터 전공으로, 넌 물리 전공으로 같은 대학교로 진학했지..."
정석 : "갑자기 신파로 빠지냐? 내가 너무 타박준거야?"
유민 : "기억나냐?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아직 해도 안 진 오후였는데, 도서관에서 나를 찾더니 바로 막걸리 먹으러 가자고 한 날. 난 그때 너에게서 미시 물리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그땐 양자 물리란 말도 안 쓰고 미시 물리라고 불렀었잖아. 아마 그날 너는 미시 물리 수업을 듣고 온날이었나봐. 꽤 흥분해 있었거든. 막걸리 마시면서 내게 '유민아, 너 그거 아냐? 사실 이 세계는 커다란 빈 공간이야. 너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는 건 일반 물리 시간에도 배웠지? 근데, 원자를 동대문 운동장 크기로 확대하면, 원자핵은 운동장 한가운데 좁쌀 보다도 작아. 전자는 운동장 가장자리 근처 어딘가에서 엄청난 속도로 빙빙 돌고 있고, 원자 내의 나머지는 다 텅 빈 공간이라고. 그럼 원자로 만들어진 모든 물질세계는 사실 커다란 빈 공간 아니냐?' 이렇게 말했었지"
정석 : "그래, 기억난다. 맞아, 내가 그때 미시 물리 배울 때 일 거야. 완전히 신세계여서 꽤나 흥분했던 기억이 나. 그때 우리가 아는 건 정말 미천했는데, 뭘 하나 새로 배우면 그게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하던 시절이었잖아? ㅎㅎ"
유민 : "맞아, 그랬지. 그때도 난 니가 하는 얘기를 신기해 하면서 재밌게 듣곤 했어... 정말 말 그대로 재밌게 들었다고. 그때는 그냥 니가 하는 얘기를 재미난 소설처럼, 술자리 안주거리 처럼 들었던 것 같아. 그리 진지하게 생각 안 하고"
...
유민 : "정석아, 넌 이 세계가 진짜 같냐?"
정석 : "아니 얘가 갑자기 다큐로 갈려고 하네"
...
유민 : "이 세계가 진짜 세계 같냐...고?"
...
정석 : "지난 100년간 이론 물리학 흐름을 보면, *에너지는 질량으로, 질량은 정보로 치환 가능하다고 하지.
결국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도, 어쩌면 다 정보라는 거야.
니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우주는 정보로 이뤄졌다는 말이면... 몇몇 물리학자들은 맞다고 할 거야. 이론적으로는.
존 휠러가 말한 *It from Bit, 요즘 유행하는 한 줄 요약으론 이게 딱이지.
근데 있잖아... 그게 전부 이론이라는 거, 너도 알지?
너 요즘 점점 현실감각 떨어지는 거 같아... 괜찮은 거지?"
유민 : "미친놈 같겠지만... 난 이수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우주가 아니라면 다른 우주에라도... 그렇다면 다시 만나고 싶다."
정석 : "너도 참 징하다... 30년 지났다. 아직도 보고 싶어? 안 잊혀져?"
유민 : "이수 보다 좋은 여자친구를 못 만나서 그런가봐..."
정석 : "넌 이수 안 만났음 평생 모태솔로 였을거다"
유민 : "지금까지 모태솔로인 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정석 : "난 물리학이랑 연애 중 인거야!"
정석은 다시 내가 펼쳐놓은 두 시를 가만히 바라보다 중얼거린다.
"질량은 정보다..."
나는 시선을 멀리 두며 낮게 말한다.
유민 : "나 요즘 이런 생각을 해. 이수는 어딘가 있어. 그게 어떤 세계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4월 CERN에서 고에너지 입자가 내 머리를 통과한 순간, 이수가 있는 곳과 내가 있는 곳 사이에 얇은 틈이 생긴 건 아닐까?"
정석 : "그날 니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긴 했으니 그때 이수가 있는 사후세계랑 통했단 얘기면 그럴싸하긴 하다. 근데 너 계속 헛소리 할래?"
유민 : "그때 나를 관통한 입자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였다면.. 그래서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정보 체계에 영향을 줘서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생긴거라면... 지금 이 우주는 정보로 구성된 시뮬레이션 세계일지도 몰라. 우리가 예전에 즐기던 리니지처럼... 서버에서 실행 중인 가상 세계."
정석은 한숨을 쉬며 말을 받는다.
정석 : "내가 이 안에서 현실이라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이벤트 루프일 뿐이라면.. 그건 좀 슬픈데... 허무한 건가 ㅎㅎ?"
정석은 유민의 눈을 마주 보며 조용히 덧붙인다.
정석 : "그렇다면 너를 이루는 소프트웨어? 너희 컴퓨터 용어로 인스턴스라고 해야 할까? 암튼 거기에 원래 디자인이 아닌, 그래서 의도되지 않은 *백도어 같은 게, 제네바 CERN에서 가속된 강입자와 니가 충돌할 때 생겼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믿으면 죽은 이수도 살려 낼 수 있을 것 같아? 게임 리셋하듯이?”
유민 : "아니 어쩌면 차원 간 통신 통로 또는 C 언어의 메모리 포인터 같은 게 아닐까?"
정석은 작게 웃었다. “웃자고 농담한 걸 너는 다큐로 받냐?”
그러나 나의 진지한 표정을 본 정석도 살짝 정색한다.
정석도 슬슬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겹치는 우연이 많다면... 어떤 우연이 두 번 이상 연이어 일어나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는 평소 정석 자신의 지론도 생각날 테니까.
나와 정석 사이엔 오랜 침묵이 흐른다.
정석에게 지금까지 사건들을 설명하면서, 나는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이 우주는 마치 거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동작하는 건 아닐까?
정석은 정석대로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하다. 처음엔 내 얘기를 반신반의하며 들었지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아마 그의 전공인 이론물리학을 바탕으로, 내 말에 자신만의 해석을 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자 컴퓨터 분야에서는 1981년, 리처드 파인만이 처음으로 고전적인 비트(0,1)와 달리, 0과 1이 중첩된 상태를 가질 수 있는 양자비트(quantum bit) 개념을 제안했다.
그리고 ‘qubit’이라는 단어 자체는 1995년, 물리학자 벤자민 슈메이커(Benjamin Schumacher)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그런데 ‘qubit’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1934년, 이상은 정말 그런 개념을 시로 은유해 표현한 걸까?
만약 그게 맞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오랜 침묵 끝에 대화가 이어진다.
정석 : "너 내가 대학에서 한창 물리학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이런 말 한 거 기억나? '이 세계에 정말 우연이란 게 있을까?' 물리학을 하다 보면, 알면 알수록 너무 치밀한 규칙에 의해 사건이 만들어진다고 느껴져. 정말 우연이 두 번이면 그건 필연으로 봐야 할 것 같거든"
유민 : "'점이 하나 있다면 방향성이 없지만, 점이 2개면 직선의 기울기, 방향성이 생긴다?'라고 내가 답했었지... 정석아, 우린 지금 점이 2개 이상 있어..
1995년 여름 시애틀 방문했을 때, 이수가 봄학기에 참여했던 연구과제 '이상의 오감도 시제 4호'를 발견했고, 내가 그 시를 복호화했어. 서울로 돌아와서 이수는 내가 복호화한 내용을 숫자열로 만들어봤데. 그리고 우연히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시인 이상이 전화를 받더니 대뜸 까마귀를 쫓아가랬다는거야. 그뒤 종로에서 영화보려고 만났을 때, 혹시 내가 장난친거 아니냐고 따져 묻더라고. '뭔소리야' 하고 그때는 끝냈는데, 그날 인사동 골동품가게에서 어떤 의자에 앉은 뒤 이수 행동이 이상해졌어. 그리고 이수는 1주일 뒤 서울에서 실종됐지. 난 이상의 시가 이수의 실종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해. 참, 오감도(烏瞰圖, 까마귀가 내려다보는 그림) 시제목에 등장하는 까마귀도 있어. 95년도에는 까마귀가 자기를 상징하는 삼태극/삼족오 문양이 있는 의자로 나와 이수를 이끌더니, 30년 만에 그 의자를 시애틀에 있는 골동품점에서 다시 보게 됐어... 이게 다 우연이라고 생각해?
'진단 0:1'과 '오감도 시제 4호'를 비교해 보면 반으로 접어 중첩시킬 수 있어. 지금은, 난... 이상이 bit이 아니라 qubit 개념을 시적 은유로 표현했다고 생각해."
정석 : "... "
유민 : “예전에 니가 나에게 이런 얘기했던 거 기억해?
신학과 과학은 늘 함께 나란히 걷는다.
인간이 어떤 현상/사건을 이해하지 못할 땐, 그걸 ‘신의 영역’이라며 신학의 틀로 포장해 오다, 이성과 논리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과학의 영역'으로 옮겨온다"
정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정석 : "맞아, 천동설/지동설이 그랬지. 중세에는 우주가 신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믿었지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관측과 수학으로 항성과 행성의 궤적을 설명한 순간, ‘지동설’이 신학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왔지...”
잠시 머뭇거리며 뜸을 들이던 정석은 테이블 위 노트북 컴퓨터를 키며 다시 말을 잇는다.
정석 : "너 지금 평소보다 감성적인건 알지? 너의 헛소리를 강화시킬까 싶어 얘기 안 하려 했는데... 어쨌든 아직 많은 검증이 필요한 진짜 최신 논문이야, 쿼크를 더 이상 단순한 입자가 아니라, ‘얽힌 정보 덩어리’로 봐야 한다는 내용이지" 라는 말과 함께 켜진 노트북을 내쪽으로 돌리며 화면 속 파일 내용을 나에게 보여준다. 제목 *'QCD Evolution of Entanglement Entropy'과 저자 'Brookhaven National Lab 소속 물리학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석의 추가 설명.
정석 : "얼마 전 Brookhaven 연구소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단위인 원자가 사실 입자라기보다는 시공간 데이터의 양자 얽힘 상태로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이론을 발표했었어. 원자핵을 구성하는 쿼크까지 LHC 입자 충돌 실험을 통해 밝혀냈거든. 쿼크는 글루온이란 매개입자를 통해 강한핵력으로 붙어있고. 이게 현재까지 물리학자들이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이지. 근데 Brookhaven 연구팀은 쿼크라는 입자가 글루온에 의해 결합된 입자라는 고정관념에서 벋어나서 쿼크가 충동 시험에서 보여주는 속성에 맞춰 LHC 충돌 데이터를 다시 해석했어. '쿼크는 입자가 아니라 양자 얽힘으로 역인 정보 덩이'라고 가정하고 시스템의 에너지 엔트로피 배열을 측정해 보니, 얽힘을 가정한 엔트로피 예측과 완전히 동일했다네. 이게 이 논문의 데이터야" 라며, 논문 내 그래프를 가리킨다.
유민 : "난 봐도 모르겠어. 이게 무슨 뜻이야?"
정석 : "한마디로 이 세상의 가장 기본 입자는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의 형태가 아니라 특정 공간 좌표값에 할당된 양자 얽힘 상태로 존재하는 정보 단위라 볼 수 있단 얘기지. 그렇다면 쿼크는 정적인 입자라기보다는 시공간과 상호작용하는 동적 데이터의 패턴이라 재정의할 수 있어. 이 정의를 받아들이면 이런 동적 데이터의 패턴으로 구성된 게 우리 우주라고 볼 수도 있겠지... 이 이론은 그동안 물리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던 LHC 입자 충돌 실험 결과도 하나 더 설명할 수 있게 해 줘. 그동안 LHC 입자 충돌 실험에서 원자를 구성하는 쿼크를 떼어내려 하면 오히려 더 많은 쿼크가 생성됐었거든. 얽힌 정보를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 떼어내려 했으니 투입된 에너지만큼의 새로운 정보, 즉 다른 쿼크들이 생성될 뿐이라는 설명도 가능해지지"
갑자기 봇물 터지듯 풀어놓는 정석의 최신 물리 이론 설명을 따라가며 이해하기 힘들어진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이를 보던 정석은,
정석 : "저자들의 논조가 꽤나 조심스럽지만 논문이 말하고 싶어하는 건, '물질은 고전적인 입자 개념보다, 얽힌 양자 상태의 밀도 행렬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야.
좀 더 자연어로 요약하면, '우릴 이루는 최소 단위는 고정된 물질 입자가 아니라, 시공간 위에 얽힌 정보 패턴'이란 뜻이야. 즉, 질량이 정보라고."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살짝 떨려나온다.
유민 : "...그러니까 물질이 입자가 아니라, 정보로 짜인 패턴... 우리 물질 세계 자체가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실현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뒷받침 하는 최신 물리 실험 결과가 있다는 거 맞지? 아직 정설은 아닐지라도..."
정석이 노트북 화면에서 나에게로 눈을 돌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정석 : "그래.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네가 제네바 CERN의 LHC 장비에서 겪은 일도... 설명이 가능할지 몰라.
입자와의 충돌이 아니라, 네 안의 정보 구조가 다시 쓰인 거라면...”
유민 : “지금 우리가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아직은 다수가 공상이라 말하겠지, 마치 과거 천동설/지동설 논쟁처럼 말이야. 하지만 언젠가 설명 가능하고, 증명할 수 있게 되면 그땐 시뮬레이션 이론도 과학의 한 장이 되지 않겠어?”
정석 : "양자역학을 인간 언어의 직관으로 완전히 이해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우주가 어떤 것인지 자연어로 말하기는 힘들거든. 우리는 단지 우주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지. 어떤 면에서, 양자 역학은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인간 인식의 ‘관측틀’을 제공하는 도구일지 몰라.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실재의 가장 가까운 그림자라고 할까... 난 요즘 물리학자로서 신의 벽을 느끼고 있다... "
유민 :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아? 이상은 그 당시 이미 실재를 알고 있지만, 언어로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함축적인 비유가 가능한 시의 형태로, 오늘날 우리가 양자역학이란 도구로 표현하는 실재에 대한 기본 개념을, 심어놓은 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누가 읽으라고?"
정석 : "너랑 얘기하다 보니 이제 나도 같이 미쳐가는 기분이네. 난 우리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을 연구했지 너 처럼 눈 앞의 실재 세계와 연결해서 혼란을 느끼진 않았거든. 이젠 나도 헷갈린다. 모르겠어, 그만하자. 해질 시간 다 됐다. 나가서 저녁노을이라도 보자. 사막지역 일몰 볼만해"
중력 관측소 외곽. 석양이 질 무렵.
정석과 멍하니 석양을 보는데, 다시 두통이 온다.
유민 : “요즘 가끔 아주 희미하게, 전자 신호처럼... 누군가 내 의식 가장자리를 두드려. 난 그게 이수 같아”
정석 : "..."
정석이 말없이 나를 본다. 모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도 말없이 다시 석양을 본다.
노을 아래 실험동의 실루엣이 음향처럼 떨렸다. 순간, 내 머릿속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내가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어. 까마귀 의자에 앉아.' 이수다.
그리고 머리 속에 명멸하는 메시지. 'YUMIN_002… SESSION_RECONNECTED…'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수는 살아 있다. 그리고 내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주석]
*리처드 파인만
https://ko.wikipedia.org/wiki/리처드_파인만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1981년,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계산을 수행하는 새로운 컴퓨터, 즉 양자 컴퓨터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는 MIT에서 열린 "물리학의 미래" 워크숍에서 이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이 발표는 양자역학적 현상을 이용하여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으로, 이후 양자 컴퓨터 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양자역학의 경로 적분 공식화, 양자 전기역학의 이론, 과냉각 액체 헬륨의 초유체 물리학, 그리고 쪽입자 모형을 제안한 입자 물리학의 연구로 유명하며 양자 전기역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65년 줄리언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백도어
백도어는 정상적인 보호, 인증 절차를 우회하여 정보통신망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정보통신망에 설치되는 프로그램이나 기술적 장치를 말한다. 대개 백도어라고 하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보안 구멍을 의미한다.
*이원론적 사고(dualistic thinking)
세상을 둘 중 하나로 나누어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선 vs 악, 참 vs 거짓, 몸 vs 정신, 0 vs 1 같은 식으로 복잡한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사고방식.
bit를 예로 들면, bit는 정보의 최소 단위로, 0 아니면 1이라는 두 가지 상태 중 하나만을 가진다. 이는 전기 신호가 켜져 있거나(1) 꺼져 있거나(0) 하는 물리적인 상태에 해당한.
*이스터 에그
https://ko.wikipedia.org/wiki/이스터_에그
이스터 에그(Easter Egg. fed kim)는 영화, 책, CD, DVD, 소프트웨어, 비디오 게임 등에 숨겨진 메시지나 기능을 뜻한다. 또한 이스터 에그라는 이름은 서양권에서 부활절에 부활절 달걀을 미리 집안이나 정원에 숨겨두고 아이들에게 부활절 토끼가 숨겨놓은 달걀을 찾도록 하는 부활절 달걀 찾기 풍습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최초의 이스터 에그는 1978년에 발매된 아타리 2600용 비디오 게임 Adventur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특정 픽셀 단위로 지나가면 이스터 에그를 넣은 프로그래머의 이름이 나온다.
구글 이스터 에그 예시 : https://www.youtube.com/watch?v=0TKaLR7lPiw
*에너지 ↔ 질량 ↔ 정보
# 에너지는 질량과 치환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 : 정지 질량을 가진 물체도 그 자체로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고에너지 상태에서는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음 (예: 핵분열, 핵융합)
(E : 에너지, m : 질량, c : 빛의 속도)
# 질량은 정보와 치환 가능하다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열역학 : 블랙홀은 엔트로피(=정보)를 가진다. 질량을 갖은 블랙홀의 표면 면적이 정보의 양에 비례한다는 뜻
S : 블랙홀 엔트로피, A : 블랙홀의 사건지평선의 면적, K : 볼츠만 상수)
*슈뢰딩거의 고양이
https://ko.wikipedia.org/wiki/슈뢰딩거의_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 역학의 중첩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사고 실험이다.
어떤 상자 안에 고양이가 있고 계수기와 망치가 연결되어 계수기가 방사선을 감지하면 망치가 상자 안에 있는 병을 깨트려 병 안에 들어있는 독성 물질이 흘러나오며, 이 상자를 열기 전에는 안에 있는 고양이가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로 중첩되어 공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 'It from Bit' by John A. Wheeler
https://ko.wikipedia.org/wiki/존_아치볼드_휠러
물리적 실재("It")는 정보("Bit")로부터 유래한다.
즉, 우주의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정보적 성질을 가진다.
*palindrome :
https://ko.wikipedia.org/wiki/회문
회문(回文) 또는 팰린드롬(palindrome)은 거꾸로 읽어도 제대로 읽는 것과 같은 문장이나 낱말, 숫자, 문자열(sequence of characters) 등이다. 보통 낱말 사이에 있는 띄어쓰기나 문장 부호는 무시한다.
*'QCD Evolution of Entanglement Entropy'
https://arxiv.org/pdf/2408.01259
주제:
양자 색역학(QCD)에서 얽힘 엔트로피의 진화를 다루며, 고에너지 충돌에서 입자들이 얽힌 상태로 생성되는 양상을 분석
요점 :
양자 얽힘(entanglement)이 입자 충돌 후 생성되는 정보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
고에너지 산란 과정에서, ‘정보’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비국소적인(entangled) 방식으로 퍼져 있다.
엔트로피(=정보 생성)의 진화는 전통적인 입자 개념보다는, ‘시공간 위에 얽힌 정보 패턴’으로 해석할 수 있다.
*Qubit
https://ko.wikipedia.org/wiki/큐비트
큐비트(영어: qubit)는 양자 컴퓨터로 계산할 때의 기본 단위이다. '양자비트'(영어: quantum bit)라고도 한다. 일반 컴퓨터는 정보를 0과 1의 비트단위로 처리하고 저장하는 반면 양자 컴퓨터는 정보를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갖는 큐비트 단위로 처리하고 저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