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다고
아들에게,
마트에서 계산대 밖으로 나오면 거기서 대기하시는 분들이 있지. 태블릿으로 공부시키게 하는 빨간펜이라던가 엘리하이라던가 그런 거. 그런 곳에서는 꼭 장난감이나 풍선으로 어린이들을 유인해. 뭐, 그분들로서는 당연한 방식이겠지. 일단 애가 홀린 듯 다가와버리면 부모는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접근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며칠 전에도 그랬어.
"뭐 시키시는 거 있어요?"
네 나이를 확인하고는 바로 물어보시더라. 예상했지. 엄마는 없다고 대답했어. 바로 돌아오는 그 시선. 그게 수순이거든. 이제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데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시키냐는 그 시선에 들어있는 건 말이야,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질책과 죄책감 자극, 그러다 네 자식은 뒤쳐지게 된다는 불안감 조장, 그래서 어쩌려고 그러냐는 공포 분위기야. 엄마는 그게 싫단다. 엄마는 어린이가 태블릿으로 공부하는 것에 반대야. 그렇게 한 번은 대답했더니 요즘 세상을 모른다는 반응이 돌아와서 이젠 그냥 "안 해요."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가로젓지. 그런 상황에서 제일 싫은 게 뭔지 알아? 엄마가 빠지고 아빠가 가면 그런 힐난성 판촉 멘트들이 훅 줄어든다는 거야. 말을 걸기가 편치 않은 거지.
너는 짧게 구경만 하고 가기로 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또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뚝뚝 흘렸지. 고개만 저으면서. 네 아빠는 그런 네게 딱 부러지게 말했어. 차에 가서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되지만, 네가 왜 말없이 우는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야 한다고. 말을 하면 다른 방법을 찾든지 네가 원하는 걸 하든지, 뭐를 해도 하는 거라고. 결국 너는 구경을 더 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우린 그곳에 다시 돌아갔어. 이번엔 엄마는 도넛 가게에 가버리고 너와 아빠만 보냈지. 너는 짧게 구경하더니 더 볼 것 없다며 무언가 이유를 댔지만 왠지 엄마 눈에는 그것마저 네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지. 더 캐물으면 더 입을 다물 것 같아서 그냥 그랬구나, 알겠어, 했을 뿐이야.
넌 하는 게 없지 않아. 태블릿으로 하지 않을 뿐이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자꾸자꾸 보고 싶다길래 구독한 어린이 잡지와, 네가 재미있다고 보는 동화책 및 만화책이야. 너는 어린이수학동아를 보고, 거기서 나오는 만들기도 하고, 요리책을 보고 만들어보기도 하지. 시험 삼아 사본 독서평설첫걸음은 재미있게 보면서 거기 실린 광고에 나온 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전시회 정보나 국회어린이박물관 정보를 보고 가보고 싶다고도 했지. 엄마 아빠가 시키는 건 운동뿐.
스마트기기나 태블릿은 결국 하게 되어 있어. 지금 세상이 그런 세상이야. 엄마 아빠가 네 어린 뇌에 벌써부터 즉각적인 고자극을 제공하지 않을 뿐이야. 자기 조절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라고 엄마는 생각해. 그 영상이 생각나는구나. 너를 키우는 데 필요한 정보를 찾다보니 우연히 소아과 의사들이 하는 채널을 알게 되었어. 여자 의사들이라 그들도 엄마이니 더 유심히 듣게 되더구나. 스마트기기로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하게 했더니, 공부 시간이 늘어났다지. 태블릿에 터치하는 그게 즐거워서. 공부보다 그 기기를 만지는 게 좋아서. 그래서 그 의사엄마도 다시 태블릿 학습을 못하게 했다고 했던 거 같아.
기기나 AI는 도구야. 도구에 휘말리면 안 돼. 도구를 잘 써먹을 사고력, 그 도구가 제공하는 게 어느 선까지가 괜찮은지 정하는 판단력이 먼저 있어야 해. 저 도구들은 양날의 검이라, 잘 휘두르면 전투력이 올라가도 그러지 못하면 다치는 수준이 아니라 잡아먹혀버리거든. 초등 입학도 전에 화면 켜놓고 학습지로 덧셈 문제 반복적으로 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엄마는 그런 건 회의적이야. 학습지에서 반복적으로 시키는 그런 건 이해만 하면 순식간에 따라잡을 것들이야. 너무 선행학습에 휩쓸려서 다 빨리 뽑아놓으면 학교에 가서는 뭐 하겠어? 그저 지루할 뿐이지. 지금처럼 엄마 핸드폰으로 마법천자문 앱 깔아서 10분씩 가지고 놀고, 영상쿠폰 중에 유튜브 쿠폰 15분씩 쓰면서 적당히 즐기자. 급할 것 없어.
네가 울어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았지만...
이것도 널 사랑해서 한 행동인 걸.
이따 태권도 잘 다녀오자.
사랑해.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