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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복과 털양말 May 02. 2024

넌 속이 상했어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미역국 끓여먹자

  아들에게,     


  어제는 너의 첫 운동회였어. 어린이집에서 운동회를 하긴 했었지만 좁은 마당에서 할 수 있는 것들만 있어서 운동회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작은 행사였는데, 이번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50m 달리기, 계주, 줄다리기 등등 여러 시합에 참가했구나.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니 초등 형아누나들 행사에 깍두기로 껴서 함께하는 것들이 많으니 엄마는 가끔씩 네가 초등학생이 된 착각이 들 때도 있어. 넌 키가 큰 편이니 아담한 형아누나들이랑 같이 있을 때 유치원생인 게 티가 안 나기도 하고 말이지.      


  50m 달리기에서 너는 꼴찌를 했어. 스타트가 늦었지. 중간에 다른 곳도 쳐다보기도 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달렸고, 마지막 결승선에 들어올 때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웃기도 했어. 엄마는 네가 꼴찌로 들어와도 괜찮아. 어차피 엄마도 운동신경이 꽝이라 네가 날다람쥐 같은 아이였으면 오히려 그게 더 놀라웠을 거야. 엄마를 닮았으니 당연한 거지. 그런데 네 결승선에서의 미소는 거짓인걸 엄마는 알았어. 흥겨운 분위기였고, 끝까지 들어왔고, 네 아빠가 맞은편에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바라보고 있었으니 엉겁결에 웃었겠지. 

  하지만 넌 속이 상했어. 시합이 끝나고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대. 유치원에 있는 유일한 네 동갑내기에게 졌다고 말이지. 넌 이기고 싶었는데. 이기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을 텐데. 계주에서도 그 친구랑 나란히 달렸는데 너는 또 졌어. 중간에서 엄마가 열심히 응원했는데, 엄마 목소리를 듣고 엄마 쪽으로 잠시 온 바람이었지. 나중에서야 네가 들어올 끝자리에 서서 응원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 엄마는 네 나이대에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이기면 더 좋지만. 네가 기분 좋아했을 테니까. 


  “집에 가는 길에 달리기 연습해 볼까?”

  네 아빠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어.

  “네!”

  너는 씩씩하게 대답했지. 

  하지만 엄마가 네게 내일 또 달리기 훈련하자고 했더니 너는 싫다고 했어. 왜 그랬을까? 엄마가 그냥 달리기 하러 나가자고 말할 걸 그랬나? 훈련이라는 말을 하지 말걸 그랬나? 생각보다 풀이 많이 죽었을까? 엄마의 머리에 물음표가 동동 뜨더라. 아이에게 너무 많은 의견을 구하지 말라는 어떤 엄마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지. 


  넌 그 친구가 이겼다고 널 놀렸다고 했지만, 아빠가 지켜봤을 때 그 친구가 널 놀린 거 같지 않대. 그러고 보니 그 친구가 네가 만든 걸 못생겼다고 놀렸다거나, 장난 삼아 부숴버렸다는 말도 종종 했던 게 생각나더라. 그 친구가 정말 놀렸을 수도 있고, 그냥 네가 그렇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어. 넌 요즘 과장되게 말하지. 뭘 조금 크게 만들면 유치원이 터져나가게 크게 만들었다고 하고, 달리기도 네가 제일 잘했다고 해. 그냥 뭐든지 네가 제일 잘했다고 말하고. 현실과는 좀 다른 이야기야. 엄마에겐 뭐든지 잘하는 아들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을까?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 걸까? 엄마가 네게 "잘한다"라는 표현을 너무 많이 한 건가? 엄마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어.      


  그래서 어린이 전문가인 선생님에게 물어보려고. 잘 모르겠는 걸 혼자 해결해 보려고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을 때는 그 방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너도 엄마처럼 도움을 구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넌 알지? 그 누구를 데려와도, 멋진 사람들 모조리 모아서 트럭으로 실어와도, 너랑은 바꿀 수 없다는 걸. 엄마는 네가 제일 소중해. 요즘 글자를 배우는 데 재미 붙인 내 아들.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쁜 내 아들. 피부가 뽀얀, 복숭아 같은 내 아들. 마음이 보들보들한 극세사 이불 같은 내 아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미역국 끓여먹자.


  사랑해.

  이따 만나.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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