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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복과 털양말 May 17. 2024

귀찮다더니

자신을 잘 돌보고 있구나

  아들에게,     


  너는 오늘 아침에 유치원이랑 태권도에 가기 귀찮다고 했지. 사용하는 어휘가 점점 다양해지더니만. 이제 귀찮음이라는 말도 알게 되었군. 충분히 가기 싫은 마음이 들 수 있지. 엄마라고 학교나 회사에 늘 가고 싶었겠니. 하지만 유치원이나 태권도가 가기 싫을 때마다 내키는 대로 빠질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딱 멈추고 더 생각이란 걸 하지 말아봐 봐. 그럼 좀 낫더라. 여기까지 말하니 너는 천천히 계란프라이를 다 먹고 유치원에 갈 준비를 했어. 금방 기분이 좋아지기라도 했는지 태권도까지 다녀와서 뭐뭐 할 거라고 계획도 말해보고 말이지.


  엄마는 어제 집안 대청소를 했어. 침실에 개미가 나와서.

  우리 집이 한 30년은 된 주택이니 벌레가 들어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엄마는 솔직히 기분이 확 가라앉았어. 울적해지기까지 했지. 자취할 때 벌레에 시달렸던 기억 때문인 것 같아. 벌레와 곰팡이. 엄마는 대학생 때 반지하 원룸에서 셋이 함께 살았었거든. 곰팡이가 넓게 피어서 한쪽 벽면을 상당 부분 잡아먹어서 아주 볼썽사나웠지. 그런 방 안에서 건조대를 펴놓고 옷을 말리니 속옷에도 곰팡이가 피어서 곤혹스러울 때도 많았지. 벌레도 수시로 들어왔고.

  하루는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나와서 방을 누빈다고 엄마의 룸메이트와 그 남자친구가 신발을 신고서 방 안에서 마구 뛰고 난리였던 모양이더구나. 바퀴벌레 약을 온 방 안에 뿌려놓고 말이야. 엄마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에 들어갔을 때 집은 난장판 상태 그대로이고, 엄마의 룸메이트는 다른 곳에서 자겠다며 나가버린 뒤였어. 집안 바닥에 에프킬라를 뿌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지. 요와 이불에도 마찬가지고. 엄마는 그날 자러 갈 곳이 없어서 방 청소를 시작했어.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을 닦고. 그러고도 약품 냄새가 빠지지 않아 마음이 찜찜했어. 그래서 창문을 활짝 열었어. 창문이 하나뿐이라 맞바람을 틔워 빨리 환기시킬 수도 없었지. 열어봤자 밖에서 보면 길바닥 위로 난 납작한 창문이었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열어야 하지 않겠어? 그랬는데도 바퀴벌레 약 냄새가 빠지지 않는 기분이 들어 바닥에 눕기 찜찜했어. 엄마는 그날 밤에 점심 먹을 때 쓰는 접이식 상을 펴고 그 위에서 새우잠을 잤지. 자는 방에서 벌레가 나오면 그날의 고단함과 갑갑함, 분노, 좌절감 같은 게 밀려와.

  장롱을 밀어 뒤편의 벽을 보니 곰팡이가 슬었더라. 엄마는 거기에 락스를 뿌리고 20분간 방치했다가 닦아내고 개미약을 충분히 설치했어. 종일 환기도 시켰지. 하루종일 쉬지 않고 움직였어. 더러워진 부엌을 닦고, 뒷베란다에서 들어오는 개미들인가 싶어서 뒷베란다도 싹싹 정리했지. 몸은 피곤해졌지만, 그래서 태권도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차에서 잠시 잠이 들어버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기분이 개운해졌어. 나갔다가 돌아오니 새로이 나타난 개미가 한 마리도 없어서 속이 시원했어. 널 벌레가 나오는 방에 재우고 싶지 않았어.      


  오늘은 몸 쓰는 건 하나도 하지 않을 생각이야. 어제 너무 많이 해서 힘드네.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또 글을 쓰다가 너를 데리고 태권도에 가려고. 오늘 당근에서 엄마의 바지를 하나 팔기로 했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연락이 없네.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하는 건 민폐인데. 왜 이런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을 내 맘같이 움직일 수는 없으니 어쩌겠어, 나나 잘 돌보고 잘 지킬 수밖에. 넌 귀찮다고 잠시 짜증을 내긴 했지만 기어이 안 가겠다고 버둥대지 않고 훌륭히 유치원에 등원했어. 자신을 잘 돌보고 있구나. 네가 늘 자랑스러워. 오늘은 어떤 간식을 챙겨야 네가 좋아할까? 엄마는 네 간식만 잘 챙겨놓고 다시 습작을 쓸 거야. 오늘 너도 나도 훌륭하게 하루를 보내보자.      


  사랑해. 이 세상에 너 같은 아들은 또 없어.

  이따 만나.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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