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려.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
아들에게,
놀이선생님을 만난 게 벌써 세 번째구나. 너는 그곳에 다녀올 때마다 아주 밝은 얼굴로 나와 엄마 마음이 대단히 흡족해. 그곳에서 네 놀이 시간이 끝나고 엄마가 10분간 상담시간을 가지는 상황을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게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굳이 먼저 네게 말을 꺼내지는 않을 생각이야. 너도 이젠 네 생각을 내게 다 말하지 않으니 네가 물어보지 않는다면 묻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 알면서도 언급 없이 넘어가는 일도 있는 거니까. 이제는 유치원 이야기를 하면서 넌 울지도 않고, 네가 무언가 모자란가 보다거나, 난 걔들 말대로 약한가 보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지.
어제는 엄마가 처음으로 네게 샤워를 맡겨놓은 뒤 화장실 밖에 나와있었지. 물론 너는 두세 번은 엄마를 불러서 도와달라고 했어. 그래도 엄마가 화장실을 벗어난 게 어디야. 다섯 살 때부터 천천히 몸 씻는 과정을 네가 하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물만 뿌려줬는데, 이제는 목도 겨드랑이도 사타구니도 다 씻고 샴푸 비누에 거품을 내어 머리도 감다니 감개무량하다. 사실 샴푸비누를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길래 어린이 샴푸를 사볼까 잠시 고민했다가, 비누 거품 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못하겠나 싶어서 안 샀어. 게다가 넌 이미 엄마 때문에 샴푸비누, 컨디셔너비누에 이미 친숙하잖니. 네가 설거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키가 되면 이제 설거지비누도 써야 할걸. 플라스틱 병은 있는 건 최대한 오래 쓰고, 새로 사야 한다면 굳이 들이지 않으려고 나름 신경 쓴다고 쓰는데 한계가 있네. 그래도 각종 비누들을 사용하고, 물을 사 마시지 않는 걸로도 예전보다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덜 내놓기는 해. 일전에 엄마랑 동네친구랑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너의 손주들 정도 시대가 되면 파란 하늘을 못 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대. 이미 오존층도 뚫렸고, 악화될 일만 남았다고. 지구는 어떻게 해야 회복할 수 있을까?
이젠 엄마가 즐겨 보는 해양다큐도 거의 공포물 수준이야. 인간들이 그야말로 할퀴고 지나간(저인망 어업에 대한 내용이 나왔거든. 저인망 어업이라는 것이 바로 바다 바닥을 다 할퀴어서 쓸어 담는 방식이야.) 그 현장을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는데 어찌나 소름이 돋는지. 그 다큐의 결말이 그래도 보호 구역을 정해봤더니 바다는 회복력이 매우 빠르더라, 저인망 어업 금지 및 보호 구역을 더 많이 지정하자, 이런 내용이었지. 그나마 희망적인 결말이라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르겠네.
엄마는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아름다운 걸 보고 싶다거나 할 때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영상을 잘 트는데, 어쩌면 내가 다가가지 못하는 영역이어서 그런지도 몰라. 엄마는 뱃멀미가 심해서 배를 타면 아주 괴롭거든. 아빠랑 신혼여행 가서 스노클링 하는데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아주 약간 벗어난 지점에서 바다 거북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는데 글쎄 생각하는 것마다 꼬리처럼 "근데 멀미 난다"가 따라붙는 거야. 저 거북이 너무 이쁜데, 멀미 난다. 수평선 위로 뜬 하늘이 너무 멋진데, 멀미 난다. 노을 받으며 뜬 요트가 너무 멋진데, 보기만 해도 멀미 난다. 배가 문제가 아니더라고? 물에 둥둥 떠서 물고기를 보는데도 멀미가 그렇게 나더라니까. 스노클링 나갔다가 얼마 못 즐기고 배 위에 올라와서 시체처럼 있다 왔지. 바닷속에서 토하면 수습하기 곤란할 거 같아서 빨리 올라왔지. 못 만져서 그런가, 너무 아름다워. 너는 엄마 말고 아빠 닮아서 배도 잘 타고 그랬으면 좋겠다. 나보다 많은 걸 눈에 담게.
이야기가 어쩌다 바다에서 토할 수 없다는 곳까지 이어졌나 모르겠네. 이렇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좋네. 평온한 일상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든든한 내면을 가진 남자로 자라나렴. 엄마는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비가 내려.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
이따 만나.
사랑해.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