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쓰는 우표 생활 칼럼
.
얼마 전 절친한 출판사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경교장에 관련된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나는 속으로
“중국집 이름 같은데 경교장이 머지? “
나는 너무 무지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활동지인 역사적인 유적으로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김구 선생은 1945년부터 암살당한 1949년까지 경교장을 임시정부의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열렸고, 특히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반탁운동의 중심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이 건물 2층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나에게 백범 김구 선생의 기억은 군생활을 하면서 썼던 몇 가지 명언 구절이었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의 길은 참으로 고난과 역경의 길이 었다. 일본 순사를 맨 손으로 때려죽이고 망명한 길은 독립의 시초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초가 되었다. 백범일지는 우리 독립운동의 산 기록이며 울부짖는 산하를 어루만지는 소리였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세 번째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은 그랬다. 오직 민족을 생각을 했고 그 노구를 이끌고 38선을 넘나들면 민족의 통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사상에는 철학이 있었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대한민국의 위치와 방향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 치 않는다. 우리의 부(富)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强)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백범은 너무나도 우리 민족의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인 사명감과 유능함을 알고 있었다. 민족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 고난을 겪을 때도 그는 몸소 민족의 혼을 밝히는 일에 앞장섰다. 폭력이 아닌 문화로 진정한 길을 제시했다.
“얼굴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사람의 유능함과 이득을 생각하자면 개인의 영달과 욕망을 추구하려는 수많은 기회를 볼 수 있겠으나 대의 위한 그의 집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요즘 날뛰는 어느 당에게 백범은 이런 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나온다.”
참으로 새겨 들어야 할 구절이다.
오늘 그런 백범 선생이 그리운 날이다.
봄비처럼
2019년 4월 11일 북경에서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된다.”
-백범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