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걸음의 소우주
3월. 가슴이 술렁인다.
'올해 다시 도시농부를 해? 말아?'
코끝을 스치던 흙냄새,
보슬하고 축축한 땅의 촉감이 그리워진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환경과 채식에 대한 관심은
20여 년 만에 나를 다시 캠퍼스로 이끌었다.
방통대 농학과 3학년에 편입한 나는 모든 작물을
책과 강의만으로 배우는데 갈증을 느꼈다.
리포트와 암기한 내용만으로는 씨앗 하나 터뜨릴 수 없기에.
작년 이맘때, 지금처럼 따듯한 봄기운이 찾아올 무렵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주말농장을 찾을 수 있었다.
처음 텃밭을 방문한 날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눈에 흙이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나를 반기는 건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혼자 히죽거렸다.
나의 짧은 다리, 좁은 보폭으로 열 걸음이 채 안 되는 땅이지만
이곳에서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지 몹시 설레었다.
운 좋게도 때마침 텃밭 대표님이 찾아오셔서 땅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실은 너무 많이 도와주셨다. 내가 하고 싶은데.
"대표님, 이제 그만 제게 삽을...
제 삽질이 그리도 어설펐나요?"
아침 일찍 텃밭 작물을 돌보고
도서관으로 돌아와 하는 농학 공부!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 님의 말씀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코로나로 앓아누운 일주일 동안 그리웠던 건
사람들이 아니라 텃밭 식물이었다.
일주일 만에 찾은 텃밭에는 무성해진 식물 사이에
귀여운 달팽이들이 만족스럽게 상추를 포식하고 있었다.
나의 손길 없이도 햇빛, 바람, 땅의 기운으로 쑥쑥 커가는 생명을 바라보는 건
단순한 기쁨을 넘어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이 묻어둔 작은 감자 조각에서 뻗어 나온 생기는
날이 갈수록 무성해져 땅을 뒤덮었다.
사방이 막힌 깜깜한 땅속에 갇혀있을 수 없었던 생명은
점점 크고 따뜻하게 빛나는 태양을 향해 끊임없이 몸부림쳤을 테지.
지하에서 지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불쑥 솟은 식물들의 조용한 열정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나를 응원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후각과 미각을 잃어버린 나는
뭘 먹어도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밭에서 수확해온
상추와 쑥갓의 엄청나게 아삭하고 싱싱한 식감만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달팽이라도 될 듯 매 끼니마다 엄청난 푸성귀를 먹어치웠다.
푸성귀의 장점은 마치 성경의 오병이어 기적처럼 끊임없이 풍성해진다는 것!
수확하는 것 자체가 선물 같은 순간이지만 더 큰 선물은 이웃과의 연결에 있다.
제아무리 달팽이처럼 먹어치운다 해도 식물들이 자라는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어떨 수 없이 그동안 소원했던 이웃들에게 연락했고
나는 그들에게 갓 수확한 친환경 무농약 채소를 정기적으로 배송했다(물론 걸어서).
오고 가는 채소 속에 싹트는 정, 나눔의 기쁨!
그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생리적인 욕구와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지는 사회적인 행복이었다.
고작 열 걸음의 작은 땅.
그곳은 나를 식물과 작은 동물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잇고 회복시키는 소우주가 되었다.
하지만 점점 바빠지는 일상을 핑계로
하지감자 수확을 마치고 텃밭 일을 접게 되었다.
지금도 이따금 텃밭 식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뿌리개 은빛 세례를 받으면 더 푸르고 짙게 몸을 불려갔던 나의 친애하는 식물들.
햇빛과 바람과 벌과 함께 춤추던 노랗고 선명한 그라데이션이 몹시 아름다웠던 쑥갓 꽃.
텃밭의 진짜 주인이자 수호자로 흙 아래의 사정을 관리해온 지렁이.
내게 알록달록 보석 같은 방울토마토를 선물해 주기 위해 열일 해준 꿀벌들.
새벽 미명마다 오이와 수박넝쿨 지지대를 말끔하게 손보시던 할아버지.
야생화를 가득 심어 텃밭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눈과 코를 즐겁게 해주고
거대한 곤충 왕국을 건설한 수줍은 미소의 아주머니.
구슬땀을 흘리며 감자를 캐고 환호하던 지적장애 청년들.
학교 가기 전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골라 날름 따먹고 학교로 뛰어가던 아들.
각자 다른 모습이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같은 햇빛을 받고 같은 땅을 밟으며 살아가는 텃밭 식구였다.
올해 나는 과연 그 귀한 인연들을 모두 끊고
고독하고 건조한 도시를 살아낼 수 있을까?
이상은 2024년 제3회 BASIL 지구생활수기 공모전 참가상만 받았던 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