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고 시작한 여행의 이야기
81,084명의 영국군이 한국 전쟁에 투입되었고 그중 1,106명이 전사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으며 1,060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직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 때 배를 타고 한국에 와 죽고 상처 받았던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질문이 시작이었습니다.
전작 <후아유>에서 A나 B에 머물지 말고 그보다 더 큰 C를 보라는 메시지를 주었던 작가 이향규가 이번에는 한국전쟁의 현장에 있었던 영국 군인들을 통해 잊히지 말았어야 할 하지만 잊고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실 책을 읽어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배달되자마자 열심히 읽었죠. 좋았습니다. 개인적 친분을 떠나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 작가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첫째, 제목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청년 마이클은 18세라는 젊은 나이에 한국 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영국 군인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마이클을 비롯해 그룬디, 데일리, 호프, 스피크먼 등의 여러 참전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가의 아버님 이야기도 나오죠. 그리고 1차 대전을 기억하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런데 왜 '마이클'과 '한국전쟁'으로 한정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마이클에서 출발한 '이야기'였기 때문 아닐까 짐작합니다. 딸 애린이가 다니는 학교 출신의 영국인 전사자 마이클을 알게 되고 거기서부터 작가는 '어디로 갈지 모르고 시작한 여행'을 떠납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또 여러 이야기를 '기억'해냅니다. 그중에는 한국전쟁 때 피난민으로 힘들게 지내셨던 아버지도 포함됩니다.
<후아유>를 읽고 쓴 글에 제가 "저자는 추상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기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머무르는 쪽을 택했다. 저자는 자신의 삶의 키워드가 '이야기'라 말한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날 때 설렘을 느낀다"라 적었습니다. 이번 책에서도 역시 많은 이야기들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한국전에서 시신 수습 임무를 담당했고 죽고 나면 동료들과 함께 부산에 묻히고 싶다는 그룬디의 이야기가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에게 잊힌 '한국전쟁'을 왜 그는 평생 기억하고 싶을까 의문이 듭니다. '아픔' 아니었을까요. 전쟁 중에도 미소를 지을 줄 알았던 한국 사람들이 있는 아름다운 땅이 전쟁의 참혹함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입니다. 작가의 아버님은 힘들었던 시절 일기를 썼습니다. 자서전도 썼고요. 그 기록이 참혹했던 전쟁 시절 아버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생각이 달랐기에 듣지 못했던 혹은 물어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작가는 아버지의 기록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제 아버지도 함흥 출신으로 평양에서 살다가 월남하셨습니다. 이북에서 결혼을 한 번 하셨다는 것. 부유한 집안 출신이셨다는 것. 잠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혼자 내려오셨다는 것. 그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계속되는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예전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솔직히 아버지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향규 작가의 아버님 이야기를 보며 머리 속에는 제 아버지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 피난 생활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러고 보니 전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살아계실 때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너무 후회가 됩니다. 여쭤보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셨을 텐데 말이죠.
먼 나라의 평화를 위해 희생한 영국 군인들의 이야기는 남북 간의 화해를 위한 시도와 어려움, 그리고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의 모습과 오버랩됩니다. 그 장면들이 만나 들려주는 메시지는 화해와 이를 이루기 위한 기억과 참회(remember and repent)입니다. '참회'라는 부담스러운 단어는 '다른 차원에서 마음을 다시 들여다 보기'를 뜻합니다. 예전 일을 기억하고 다시 들여다볼 때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사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노력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함이겠죠. 단순히 용서하고 잊어버리기(forgive and forget) 보다 화해를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노력. 마이클의 이야기로 시작한 작가의 여행은 아버지와의 화해를 거쳐 아직도 갈라진 한국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뉘어진 두 광장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길지 않더라도 그저 '굿 모닝' 한 마디 정도는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