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만남 네 번째 이야기
1993년 12월 8일 수요일.
인숙은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수업 중 하나가 취소되어서 저녁 5시 이후에 시간이 비게 된 것이다. 갑자기 생긴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런데 그날 따라 친구들이 바쁜 척을 한다. 연락이 안되거나, 연락이 돼도 선약이 있단다. 못된 기집애들. 결국 약속을 못 만든 인숙은 재호가 생각 났다. 어제 못 간다는 말에 조금 기분이 나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실망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오늘 만나자고 해볼까? '그런데 이 남자 오늘 시간이 있을까...?'
재호는 오늘도 시간이 된다고 했다. 결국 5시에 신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니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맨날 약속도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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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나 재호야, 근데 어쩌지? 오늘 내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 어떻게 내일 보면 안되겠니?"
"뭐 할 수 없죠. 그 대신 오빠 내일은 꼭이에요."
인숙의 전화를 받고 재호는 당장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갑자기 온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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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 5분 전. 재호는 약속 장소 건널목에서 시계를 보며 서있었다. 미리 가서 기다릴까? 아직 5분이 남았는데? 처음부터 너무 좋아라 하고 일찍 나타나면 인숙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남자가 너무 적극적으로 나가면 상대방은 좀 물러서게 된다고 하던데. 한 5분 정도 늦게 나타나서 매달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걱정과 잔머리에 약속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전략이라면 전략이랄 수 있게 재호는 약속시간보다 정확히 5분 늦게 도착했다. 인숙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인숙은 긴 코트를 입고 나왔다. 인숙은 그 모습이 참 어울렸다. 키가 커서 그런가. 늦게 나왔다고 미안하다고 해도 처음이라 그런지 괜찮다고 맘 좋게 받아넘긴다.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저녁은 먹어야 하겠기에 둘은 식당을 찾았다.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선심을 쓰고자 하는 재호의 마음과 직장인 선배가 자진해서 밥 사주겠다는 데 이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는 인숙의 마음이 합쳐져, 꽤 비싼 철판구이 집으로 가기로 했다. 주인 아줌마가 직접 와서 팬 위에 기름으로 '장수'라고 글씨를 써주는 것이 기억에 남는 그 식당에서 재호와 인숙은 처음으로 서로에게 개인적인 질문들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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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남자가 처음부터 늦어? 은근히 화가 나면서도 인숙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바람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약속시간 5분이 지나서야 재호가 나타났다. 10분 전부터 길에서 재호를 기다린 인숙은 재호가 얄미웠지만 처음 만남인데 5분 늦은 거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졸지에 이해심 많고 너그러운 여자가 되어버렸다.
장수라는 곳에서 철판구이를 먹으며 교회 선배와 후배가 이런 곳에서 만난다면 할만한 이야기, 즉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고 철판구이집을 나섰다. 밥 사달라 했다고 밥만 먹고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재호는 그냥 인숙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희한하게 그 동네엔 카페가 없었다. 결국 찾다 찾다 들어간 곳이 '알프스'라는, 이름도 꼭 10년 전 양식집의 이름을 하고, 분위기도 꼭 10년 전의 분위기를 가진 곳에 들어갔다.
하지만 식당이 좀 촌스럽다고 둘 사이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아닌 듯. 재호는 아주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숙은 재호와 이야기하면서 그가 뭔가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기도 하면서 뭔가 색다른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난 직업을 10년 만에 한 번씩은 바꾸어보고 싶어.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는 것은 퇴보라고 생각하거든."
그런 재호의 모습이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아도 다른 이들과 달라서 신선했다. 이 남자 그래도 괜찮은 남자네? 다음번에 재호가 또 한번 만나자고 하면 굳이 거절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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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와 인숙은 같은 버스를 탔다. 먼저 인숙이 내리고 재호는 몇 정거장 더 가서 다른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가면 되었다. 좌석버스 안에서 옆에 사이좋게 앉아서 이야기하면서 재호는 인숙이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 봐야 육체적 접촉 하나 없는 아직도 약간은 어색한 자세였다. 아쉽게도 인숙은 금방 내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얼마 안된다는 말에 그냥 버스를 타고 갔지만, 인숙을 보내자마자 재호는 후회를 했다. 집까지 바래다 주었어야 하는데.
인숙은 장로님 아버지와 권사님 어머니를 두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 일곱 시면 가정예배를 드리는 신앙교육이 잘 되어 있는 가정이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음에도 인숙은 막히지는 않은 조금은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놀기도 좋아하고 말도 잘하고, 이해심도 있고. 장녀라 그런지 사람을 잘 챙기는 것 같기도 하다. 뭐가 씌었나 보다. 뭐하나 나무랄 데 없는 과분한 여자다. 재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집에 온 재호는 갑자기 허탈감을 느꼈다. 빈 방에서 홀로 침대에 누운 재호는 인숙이 보고 싶었다. 헤어진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오래된 교회 생활. 남녀 공학이었던 고등학교. 항상 주위에 여자가 있었다. 여자친구도 있었고 짝사랑도 해봤다. 여자를 그리워한 적도 있었고 마음 아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인숙은 달랐다. 사랑을 하고 싶어 누군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그리워하는 것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다른 그런 느낌.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건가? 한 달 후면 스물여덟이 되는 재호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걸 이 나이에 느끼게 된 거다.
재호는 인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숙이 전화를 받았다.
"잘 들어갔나 궁금해서 걸었어"
"잘 들어왔죠. 오빠는요? 힘들지 않아요? 내일 일찍 가야 된다면서요."
"힘들긴 뭐. 괜찮아. 지금 뭐해?"
"뭐 지금 들어와서 그냥 음악 들으면서 과자 먹고 있어요. 씻어야 되는데... 나갔다 오면 보통 이렇게 쉬어요."
처음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건데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재호네 회사는 출근이 일곱 시다. 하지만 재호는 인숙과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도 설렘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살다 보면 정이 들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마음속에는 없었다. 이제 어떻게 정희와 헤어질 것인가가 문제였다.
* * * * *
인숙은 집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서 음악 들으며 군것질하는 것을 좋아했다. 늦은 시간에도 살찔 걱정 없이 잘 먹는 것은 인숙 집안의 내력이다. 오디오에서 "기억 속의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다. 오태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인숙은 방금 통화를 끝낸 재호를 생각했다. 별 생각 없이 밥 한 끼 얻어먹자고 만난 것이었는데, 여운이 많이 남는 만남이었다.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밤 늦게까지 전화 통화도 하고. 이거 이러다 사귀는 거 아냐?
인숙은 오늘 만남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교회 선배 만나서 식사 한 번 한 건데 뭐.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근사한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왔는데, 재호는 그런 기대와는 안 맞는 남자다. 그냥 편한 교회 오빠, 안 보면 조금 허전할 것 같은 사람. 인숙에게 재호는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