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그와 그녀의 만남 다섯 번 째 이야기

by 쉐아르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아침에 울리는 알람 소리가 반갑고, 네 시간도 채 못 자 머리가 멍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고, 전철에서 회사까지 걸으며 맞는 차가운 바람도 시원하다. 약속만 없었다면 오늘도 만나자고 하고 싶지만 오늘마저 약속을 취소하면 안 되기에 그럴 순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다음주에 만나자고 할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재호는 하루 종일 인숙에게 전화하고 싶은 걸 참느라고 고생했다. 만나자마자 자꾸 전화하고 그러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너무 적극적으로 나가면 또 도망가는 거 아닐까? 그런 걱정에 재호는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전화를 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김치볶음밥을 먹으러 갔다. 어제부터 계속 볶음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 음반가게가 보인다. 인숙이 좋아한다는 오태호 시디를 하나 샀다. 얼굴을 보니 좀 느끼하게 생겼던데 노래는 잘 한다. 인숙에 대하여 하나 더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오태호 시디가 하나만 나와있길래 다행이지 열 개였으면 열 개 다 샀을 것 같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했지만 인숙이 받지를 않았다. 친구라도 만나고 오나? 인숙을 보고 싶은 마음과 내일 만날 정희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재호는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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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은 인숙에게 힘든 날이다. 다른 날보다 많은 수업. 밥 먹을 시간이 마땅치 않아 수업 다 마친 후에야 혼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오면 비어 있는 집안은 유난히 더 쓸쓸해 보였다. '혼자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오늘은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방이 넓어 보인다. 이럴 때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누면 좋으련만. 재호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오늘은 전화 안 하려나? 혼자 있는 인숙과는 달리 부모님과 같이 사는 재호라 함부로 전화할 수도 없었다. 내일은 회사로 한번 전화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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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과의 만남이 있은 후 정희와 만나는 것은 재호에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 재호는 이제 자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아니 인숙이 자기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의미 없는 만남을 가질 수는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 재호는 별로 말도 없이 뚱하게 있었다. 재호는 정희가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결국 재호는 아무 이야기도 못하고 식당에서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오락실이 있어서 같이 농구도 했다. 뭔가 활동적인 걸 해서 그런가 다른 날보다도 더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재호는 미안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재호는 인숙 생각이 났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아닌 건 아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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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니 열 시가 넘었다. 보통 때라면 이른 출근을 위해 누워 잠을 청할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라도 들어야 했다. 낮에 전화를 했지만, 시간이 안 맞아 통화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강 씻고 침대에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고 재호는 전화를 들었다. 어느새 날씨가 많이 싸늘하다. 그렇다고 난방을 켜기에는 이른 듯하고. 이불을 끌어 몸을 덮으며 재호는 맞은 편 하얀 벽을 바라 봤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해보았지만 집중이 안된다.


이제는 집에 들어왔겠지 생각하며 전화를 했다. 인숙이 전화를 받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한 통화가 10분 20분 30분을 넘어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장 이야기. 가족 이야기. 공통의 관심사인 청년부 이야기. 즐겁게 이야기하는 마음 가운데 재호의 마음속에는 조바심이 생겼다. 인숙에게 중요한 문제를 숨기고 있다는 마음이 힘들게 했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편하지 않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겨우 처음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터져 나왔다.


"인숙아. 사실은 나 집에서 결혼하라고 하는 사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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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웃으며 걸어오던 재호가 갑자기 뒤로 아득히 물러났다. 아늑했던 방이 다시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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