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만남 여섯 번째 이야기
토요일. 평소라면 늦잠을 잤을 텐데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인숙은 어제의 통화를 생각했다.
"인숙아. 사실은 나 집에서 결혼하라고 하는 사람 있다."
많이 놀랬다. 그리고 실망도 했다. 좋은 사람은 다 자기 짝이 있는 거구나 하는 마음. 하지만 더 놀라웠던 건 잠깐의 침묵과 어색함 뒤에 재호가 쏟아낸 말들이었다.
"나 사실 '살다 보면 정이 들겠지' 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하자는 데로 따라가고만 있었어. 사람 만나고, 알아가고, 상대방 마음 얻기 위해 애쓰는 과정도 귀찮고. 다 같은 사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런데 너를 만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라. 나 너 굉장히 좋아하나 봐. 너 없으면 안될 것 같아. 인숙아. 나 평생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졌어."
* * * * *
복잡한 마음에 늦게야 잠이 들었지만 재호의 눈은 일찍 떠졌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재호는 만난 지 이틀 만에 그것도 전화로 인숙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사계절은 같이 보내야 한다고 믿던 재호가, 데이트 한 번이 전부인 인숙에게, 집안에서 결혼시키려는 여자도 있는 상황에서 '나 너 아니면 안돼' 하는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발언인지, 혹은 운명적인 사랑인지 그런 건 재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인숙과 같이 있고 싶다는 것, 그렇기에 인숙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 그 마음뿐이었다.
마음에 담아놓은 말을 했다는 후련함보다 걱정이 앞섰다. 이게 뭔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근사한 선물이라도 준비하고 했어야 할 고백을 겨우 한번 만난 상황에서 갑자기 해버린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황스러워하는 인숙의 목소리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어떻게 통화를 끝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통화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어제의 통화가 마지막이 되는 건 아닐까? 싫다고 하면 어쩌지? 도망가지는 않을까? 잘 될 수 있는 사이를 내 성급함이 망쳐놓은 것은 아닐까? 정희의 일도 걱정이다. 뭐라 말하지? 부모님에게는 어떻게 설명할까? 갑자기 인숙의 이야기를 꺼내면 당황해하시지는 않을까? 중매쟁이는 또 얼마나 극성을 떨까?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이 안 그려졌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새삼 자신이 사랑에 참 서투르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실패에 대한 걱정 때문에 물러설 수 없다. 그러기에 인숙은 어느새 그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 * * * *
인숙은 혼란스러웠다. 만난 지 이틀 만에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요즘 세상에 '살다 보면 정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정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신기한 남자였다. 근데 이상한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도,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하고 도망가지 않는 자신이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재호의 말도 듣기 싫지 않았고, 사랑도 없는 결혼을 그냥 끌려가다 할지도 모른다는 재호의 믿어지지 않는 말에도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동정심이 생겼다.
요즘 세상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그것만은 고쳐주고 싶었다. 그래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 최소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막아줘야지. 이건 정말 오빠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좋아서 이런 거는 아니라고.
* * * * *
전화가 왔다. 재호다.
“인숙아.”
어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말하는 재호도, 듣는 인숙도 어쩐지 어색했다.
“어제 많이 놀랐지?”
“갑자기 그런 이야기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 내 이야기가 당황스럽고 부담스럽다는 것 알아. 하지만 내가 말한 것 잊어달라든지, 아니면 그냥 편하게 만나자든지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아. 인숙아 나 너 좋아한다.”
자기를 좋아한다는 그 말이 싫지 않음에도 인숙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한번은 더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토요일에는 시간이 안되었다. 만나고 싶었지만, 둘은 일요일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 통화를 마쳤다.
다음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분명 한 건 둘 다 지금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