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용한 턴테이블들
1.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턴테이블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한 달 과외비가 20만 원이었는데 두 달치를 털어 인켈의 일체형 리시버와 턴테이블, 스피커로 구성된 제 첫 오디오를 구입했죠. 장식장도 받았습니다. 일체형이라고 한 이유는 모양은 테이프덱, 앰프, 라디오 등이 앞에서 보면 분리된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한 통 안에 합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눈속임이죠. 그때 턴테이블이 어떤 모델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구입시기를 이용해 찾아보면 대략 인켈 PS-1370이었던 것 같습니다.
2.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 턴테이블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습니다. 아니 오디오 자체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죠. 제 방이 3.5평 정도였던 것 같은데 창문 없는 쪽 중앙에 오디오를 배치했습니다. 스피커가 방 크기에 비해 꽤 컸는데, 뒷벽과 오디오 장식장에 딱 붙여서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밍이 참 심했을 배치인데, 그래도 참 즐겁게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오디오, 특히 턴테이블에 대한 지식이 없어 매뉴얼 보고 턴테이블과 앰프를 연결하고 끝이었습니다. 트래킹포스니 안티스케이팅이니 전혀 몰랐죠. 그냥 바늘이 미끄러지지 않으면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트래킹포스를 잔뜩 올려서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 음반들이 괜찮게 플레이되어 다행입니다.
3. 서울의 자양동에 살았는데, 근처 명성여고 앞 음반가게에서 음반을 싸게 팔았습니다. 이천 원에 한 장이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정말 싼 가격이죠. 요즘 가치로 칠천 원에 살 수 있다는 거니까요. 과외비 받으면 세네 장씩 산 음반이 꽤 되었습니다. 그러다 CD가 등장했고, 한동안 CD와 LP를 섞어서 듣다가 CD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LP 음반들을 버리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죠. 아직도 대부분 좋은 상태로 플레이가 가능하니까요.
4. 결혼을 하면서 아내가 가지고 있던 음반도 같이 왔습니다. 하지만 결혼초 집안 사정이 너무 힘들어 음악을 들을 여유는 없었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태어나고 미국으로 옮기면서, 아니 어쩌면 그전에 처음으로 가졌던 오디오를 버렸습니다. 사진이라도 찍어놓을 걸 아쉽네요. 그래도 LP는 꾸역꾸역 미국까지 들고 왔죠. 이 음반들은 이후 십 년 동안 책꽂이 구석에서 얌전히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2002년엔가 미국에서 첫 집을 구입하고, 홈씨어터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AV가 유행이었거든요. 시디는 DVD플레이어로 들을 수 있었지만, 턴테이블은 없었습니다.
5. 2006년엔가 두 번째 집으로 갔습니다. 리빙룸이 하나 더 있는데 음악 듣기에 딱 좋았습니다. 그래서 음악만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기로 했죠. 턴테이블도 하나 구입하고요. 한참의 연구와 발품을 통해 카버의 M-1.5t 파워앰프와 Superphon의 프리를 갖추었습니다. 스피커는 고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싶었던 보즈의 901IV와 미라지 M-7si 중에서 고민하다 미라지를 선택했습니다. 턴테이블도 구입했습니다. 이베이에서 $52을 주고 파이오니어의 PL-512라는 모델을 구입했습니다. 슈어의 카트리지가 달려있었습니다. 덮개의 뒤 쪽이 깨져있어 순간접착제로 붙여서 사용했죠.
6. 십 년을 묵혀두던 음반을 하나씩 꺼내어 듣는 즐거움이 참 컸습니다. 다행히 휜 음반 하나 없이, 잘 살아 있더군요. 유재하 음반을 다시 올려놓고 들을 때의 떠오르는 옛 기억 속의 약간의 회한이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도 턴테이블에 대해 잘 모르고 사용했네요. 겨우 침압이나 안티스케이팅 맞추어 쓴 정도입니다. 음반 청소는 전보다는 신경 쓰기 시작했습니다. PL-512도 나쁘지는 않지만, 요즘 시스템에 비하면 부족한 모델입니다. 그때는 바이닐은 완전 뒷전인 때라 Craigslist(미국판 벼룩시장)을 통해 음반 통째로 처분하는 걸 몇 번 사서 음반 개수도 확 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때 구입한 음반 중에 들을만한 음반이 별로 없습니다. 관리들을 정말 엉망으로 해놔서요.)
7. 2018년부터 집안 사정상 음반들이 다시 창고에 들어가 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3년 전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창고 여러 개에 흩어져 있던 짐을 모았습니다. 아쉽게도 백 장 가까운 음반이 보관의 실수로 휘어져있었습니다. 음반을 세워서 보관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이때는 몰랐거든요. 휘어진 음반들을 펴보려 여러 방법을 썼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가치가 높았던 음반들도 아니라서요. 다행히 한국에서 구입한 음반들을 잘 보관이 되었습니다.
8. PL-512는 이사를 여러 번 하며 고장이 나서 버렸고, 새로 하나를 장만했습니다. 예산을 크게 잡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똘똘한 녀석을 고르고 싶었죠. 조사 끝에 DROP이라는 회사에서 Audio Technica와 함께 기획한 턴테이블을 구입했습니다. 300불 가격에 카본 톤암과 AT-VM95E 카트리지, 포노앰프까지 갖춘 가성비 좋은 모델이었습니다. 이걸 선택하기 위해 여러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고, 본격적으로 바이닐에 대한 지식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한시적으로 제작하기에 지금은 살 수 없지만, DROP에서 판매하면 항상 금방 완판 되는 인기 있는 제품입니다.
9. 음반 세척에도 신경을 써 진공청소기도 구입했습니다. 음반의 먼지 제거가 중요한 문제인데 진공청소기가 꽤나 효과적이거든요. 한참 조사해서 Record Doctor VI를 구입했습니다. 새로운 음반도 하나씩 구입하기 시작했고, 제품에 딸려온 카트리지 말고 다른 카트리지도 시도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바이닐로 음악 듣는 게 즐거워졌죠.
10. DROP 턴테이블을 2년 반 정도 사용하고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를 준비했습니다. 가성비가 참 좋은 제품이지만, 조금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세 달 정도 찾았습니다. 유튜브 영상도 보고, ChatGPT에 물어도 보고. 가격과 디자인, 성능을 다 고려해서 하나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업그레이드가 마지막이라 생각했거든요. 음악이 중요하지, 오디오에 너무 큰 시간과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11. 디자인이 맘에 쏙 들어 갖고 싶었던 제품이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 영국 회사인 Rega 제품입니다. 바이닐 분야에는 명성 있는 회사입니다. 턴테이블도 잘 만들고, 카트리지도 잘 만드는 회사입니다. 묵직한 방향이 아닌 테이블의 질량을 최소화함으로 진동을 줄이겠다는 설계철학도 맘에 들었습니다. 근데 가격을 생각하면 Planar 3가 적당했는데, 33과 45를 바꾸기 위해서 플래터를 빼고 벨트 위치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고민하던 중 이 문제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개선되고, Nd5라는 꽤나 좋은 카트리지를 포함한 P3 RS Edition이라는 모델을 알게 되었습니다. (RS는 Rega Special이라는 뜻입니다. 아직은 P3 기반의 RS만 있습니다.) 금액은 처음 예상보다 훌쩍 올라갔지만, 생일, 크리스마스, 결혼기념일, 아버지날 선물까지 다 합쳐서 맘에 드는 거 사라는 아내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질렀습니다.
12. P3 RS 정말 맘에 듭니다. (가격을 생각하면 좋아야죠 ㅋ) 나중에 따로 리뷰글을 적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두 개의 턴테이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P3 RS는 예전부터 사용하는 V-LPS 포노 스테이지에 물리고 Drop 턴테이블은 Advance Paris A10의 내장 포노스테이지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P3 RS의 소리가 워낙 좋아서 거의 여기에서 음악을 듣고 있죠.
13. 쓰다 보니 길어졌네요. 턴테이블을 통해 제 오디오 인생을 정리한 느낌입니다. 오디오가 주목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지 않은 시간과 돈이 들었네요. 그래도 아깝지는 않습니다. 이를 통해 좋은 음악을 즐거운 소리로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