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만남 에필로그
한참을 브런치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왔어요 ^^ 처음부터 이 '그와 그녀의 만남'을 읽으신 분은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 이 글은 저와 아내의 이야기를 담은 99%가 실화인 자전적 소설입니다. 저와 아내의 이름을 빼고 다른 등장 인물들은 가명임을 밝힙니다.
1994년 1월 21일 금요일
일찌감치 회사를 나선 재호는 신세계 백화점을 향해 걸어갔다. 아침 일곱시 출근이 힘들긴 하지만, 퇴근후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제 시간에 퇴근할 수만 있으면 말이다. 거의 매일 한시 넘어서야 잠들기에 이른 출근이 부담스럽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회사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신세계지만, 별로 올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자주 온다. 재호는 얼마전 인숙의 장갑을 샀던 매장을 지나 반지 파는 곳으로 갔다. 마음에 둔 보석은 사파이어였다. 재호는 사파이어가 좋았다. 검은색이어서 그랬을 거다.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반지를 고르던 재호 눈에 맘에 드는 것이 보였다. 월급의 십분지 일이다. 더 할수 없는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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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내일 거기서 봐요." "가보진 않았지만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걱정마요."
인숙은 내일 재호와 만날 약속을 했다. 토요일. 전 같으면 한창 친구 만나며 바빴겠지만, 요즘은 만나자고 하는 친구도 없다. 아직 알려준 친구는 많이 없지만, 인숙에게 누군가 생겼다는 걸 모두 알기 때문이다. 매일 밤 한시 넘게까지 인숙의 전화는 통화중이었다.
지난 두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갑작스런 저녁 식사와 프로포즈. 도데체 두번째 만났을 때 목도리는 왜 걸어주었는지. 그때부터 인숙의 하루는 재호로 채워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하고 있는 재호와 통화를 했고, 저녁에 퇴근하면 재호와 통화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둘다 시간이 날 때면 항상 만났다.
학원에서 일하는 게 이럴 때는 안좋았다.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재호와 오후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는 인숙과는 시간대가 안맞았기 때문이다. 가끔 수업이 일찍 끝나기도 했지만, 항상 재호와 시간이 맞는 건 아니었다. 대신 전화를 많이 했다. 퇴근하고 열시반쯤 시작하는 통화는 매번 한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일찍 출근하는 재호가 걱정돼 끊으라 말하지만, 재호는 항상 괜찮단다. 근데 사실 끊으라고 해서 끊었다면 서운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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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이야기되던 결혼을 무르는 건 순조롭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그래도 쉽게 넘어갔다. 갑작스런 선언에 놀라고 당장 이해는 못하신듯 했지만, 단호한 재호의 모습에 더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결혼 성사 했다 여겼던 중매장이의 전화도 괜찮았다. 어려웠던 건 직장에 찾아온 정희 어머님과의 만남이었다. 아침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딸이 불쌍하다며 눈물 짓는 그 앞에서 단호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정희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한 건 실수였다.
지난주에는 인숙의 부모님도 만났다. 아이러니하게 재호가 출장가는 언양은 울산에서 삼십분 거리다. 울산으로 다니는 회사 셔틀도 있다. 재호는 인숙의 고향이고 인숙의 부모가 사는 울산 근처에 가있고, 인숙은 재호의 고향이며 재호의 부모가 사는 서울에 있는 거다. 재호를 보고 싶다는 인숙 부모님을 만나뵈러 재호는 울산에 처음 가봤다. 톨게이트를 지나고 바로 만나는 로터리에서 내린 재호는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인 뷔페로 갔다.
인숙 부모님은 너무 편안히 재호을 맞아주었다. 어려운 자리에도 푸짐하게 식사를 한 건 꼭 음식 맛이 좋아서만은 아니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니시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이십일 금식도 하신 인숙 아버님은 재호의 신앙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권사님이신 어머님도 마찬가지. 초등학교 5학년부터 교회를 다닌 재호는 다행히 두분의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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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가 누나 셋을 둔 삼대독자라는 사실은 솔직히 인숙에게 부담스러웠다. 이번에 재호 집에 가서는 재호의 부모님과 큰 누나, 둘째 누나를 만났다. 막내 누나는 미국에 가 있기에 볼 수 없었다. '시'짜 들어가는데 쉬운게 있을까냐마는 그래도 인숙은 편하게 생각했다. 재호의 아버님은 자상한 신사셨다. 어머님은 몸이 불편하셨지만,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나중에 결혼하면 두 분을 모시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또 모시고 살면 어떤가. 아빠 엄마처럼 같이 지내면 되는 거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재호를 만나본 엄마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참 좋은 사람이더구나. 너가 너무 힘들게 하지마라." 내가 뭘 힘들게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시는지. 그래도 재호가 부모님 마음에 들었다니 안심이다. 근데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가는 것 아닌가. 두달도 안되어 양쪽 부모님 찾아가 인사도 드리고. 상견례만 안했지 다음달에 결혼할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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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22일 토요일
재호는 대학로를 걷고 있었다. 겨울 바람이 차거웠지만 그래도 토요일 오후의 햇살 덕에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추운 날씨에도 대학로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대부분이 연인이었다. 몇달 전만 해도 부러움의 눈빛으로 쳐다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학로 끝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카페가 오늘 약속 장소다. 이곳을 택한 건 예뻐서였다. 붐비지도 않고 카페에서 보는 바깥 경치가 괜찮았다. 오늘 다행히 창가 자리가 비어있다. 기분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숙이 도착했다. 빨간색 가죽 장갑이 눈에 들어온다. 긴 손가락에 잘 어울린다. 남자 치고 손이 작은 재호는 손가락이 긴 인숙의 손을 잡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물론 길이에 상관없이 손 잡으면 좋았겠지만.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재호는 인숙과 이야기를 했다. 틈날 때마다 보고, 하루에 몇시간씩 통화를 했어도 아직도 할 이야기는 많았다. 말이 적은 재호가 주로 들었지만, 간혹 말이 끊겨도 괜찮았다.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잠시후 때가 되었다 싶었다. 재호는 준비한 것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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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와 본 카페가 너무 예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게다가 재호를 며칠만에 보는 거다. 오랜만에 대학로에 나왔으니 공연도 좀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갈 계획이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재호가 뭔가를 꺼낸다. 작은 네모난 상자. 귀걸이? 반지? 재호가 상자를 여니 검은색 사파이어 반지가 보인다.
"전에 너무 급작스레 프로포즈를 한게 마음에 계속 남아있었어. 그래서 엉켜져 버려진 순서지만 할 건 하려고."
당연하지. 세상에 첫 데이트하고 이틀만에 프로포즈 하는 남자가 어디있나. 나니까 불쌍해서 옆에 있어 준거지. 게다가 재호나 인숙이나 양쪽 부모님들을 찾아 뵈었다. 날짜만 안 잡았지 결혼 허락을 받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 이제 도망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정식으로 프로포즈 하겠다고 준비한 이 남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했다. 재호를 만날 수 있어서.
"인숙아 나랑 결혼해주지 않을래?"
인숙은 잠시 생각했다. 망설이는 건 아니었다. 예정에 없던 재호와의 만남 그리고 너무 빨리 지나간 두달을 잠깐 떠올렸다. 이 사람.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사람이다.
인숙은 수줍게 하지만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