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2월 24일 토요일 #1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이브

by 쉐아르

재호는 일찍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 도착했다. 마을 버스를 기다렸지만,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차가 오지 않는다. 그냥 걷기로 했다.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버스를 타려 한 건 조금이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하고 싶어서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경희대 앞길은 성탄절 분위기가 흠뻑 났다.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다. 이른 시간이라 조용했지만 오후부터 이 길은 연인들로 북적댈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재호에게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특별한 날이었다. 항상 교회 모임으로 분주했고 크리스마스이브를 집에서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다른 일로 특별하다. 인숙이 경희 의료원의 중환자실에 누워있기 때문이다.

1993년 12월 8일 둘은 첫 데이트를 가졌다. 이틀 후 재호는 인숙에게 청혼했고, 1월 21일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4월 23일, 개인적 만남을 가진지 네 달 반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도 많지 않은데 왜 그리 급하게 하느냐고, 사고 친 거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신혼여행에 돌아온 다음 주부터 재호는 월요일이면 지방 출장을 떠나 주말에 돌아왔다. 3대 독자인 재호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냥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처럼 살면 되지 생각했던 인숙이였지만, 울산에 있는 부모님과 떨어져 남편도 없이 시부모와 같이 사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자식을 빨리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매일 소식 없느냐 물으시는 덕에 둘은 한 달만에 신혼도 없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재호가 일하던 언양 프로젝트는 여름에 끝이 났다. 그런데 다음 프로젝트가 거제도다. 계속되는 주말부부 생활에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한번 내려가면 2주씩 있어야 할 것 같다. 결국 재호는 회사를 떠나 작은 중소기업으로 옮겼다. 주말부부 생활은 안 하게 되었지만, 이직 후 바로 두 달간의 미국 출장이 있었다. 94년 10월 2일 재호는 처음으로 미국에 발을 디뎠다.


미국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지만, 실제 생활은 쉽지 않았다. 운전을 못하기에 겪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배가 제법 불러오는 인숙을 혼자 두고 떠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미국에 오려던 인숙의 계획이 비자를 받지 못해 무산됨으로 더 마음이 안 좋았다. 하루에 한 시간씩 전화 통화를 하고 일주일에 두세 통씩 편지를 교환했지만 서로 느끼는 그리움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해 머라이어 캐리가 캐럴을 발표했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재호의 마음을 대신해주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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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간은 갔다. 2주만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사고가 생겼다. 인숙이 돌계단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힌 것이다. 재호 아버지가 우연히 밖에 나와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거다.

급히 119를 불러 가까운 경희의료원에 도착했다. 상황은 심각했다. 두개골에 금이 갔고, 산모와 아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바로 미국에 있던 재호에게 연락이 갔다.

여느 때처럼 쓸쓸한 저녁을 보내던 재호는 그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게임처럼 저장 파일을 다시 올리고 싶었다. 현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급히 짐을 싸고, 내일 나간다고 하숙집에 이야기하고 회사에 상황을 설명하고 비행기 일정을 바꾸었다. 다음날 아침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탔다. 휴대전화도 없던 때다. 겨우 공중전화를 통해 듣는 소식은 아직 인숙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런 와중에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가 결함으로 취소되었고, 대신 뉴욕을 경유하게 되었다. 뉴욕에 도착해서 보니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 있고, 비행기 좌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기다리는 여섯 시간 동안 얼마나 사정을 했는지. 다행히 자리가 생겨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가뜩이나 마음이 타는데 반나절이 늦어졌다.

서울까지 열네 시간이 걸렸다. 비행기 안에서 재호는 온갖 생각을 다 했다. 내 잘못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회개도 하고, 갑자기 이렇게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냐는 원망도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인숙이 살아있을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 도착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인숙이도 아이도 무사했다. 기적이었다. 조금 전에 정신이 들었고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소식도 들었다. 너무 감사했다.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마침 면회시간이라 가족들이 다 와있었다.

그날 본 인숙의 모습을 재호는 잊을 수가 없다. 머리에는 붕대를 두르고, 비스듬히 기댄 상태에서 '자기 왔어요'하며 힘겨운 하지만 환한 미소로 재호를 맞이하던 인숙의 모습. 너무 예쁘고 너무 사랑스러웠다. 고마웠다. 남아있어 줘서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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