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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아르 May 10. 2017

당신 인생의 이야기

놓칠 수 없는 최고의 지적 유희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설정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판타지라 분류한다면 SF(Science Fiction)도 판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미국 서점에 가면 판타지와 SF를 대부분 섞여 있습니다. 판타지와 SF를 같이 다루는 잡지도 있지요. (예전에 SF를 공상과학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사실 판타지와 SF를 다룬 Fantasy and Science Fiction 잡지가 일본에 소개되면서 '공상과 과학'이라 번역되었던 게 한국으로 넘어오며 공상과학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SF를 판타지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안에 담겨있는 과학적 원리 때문입니다. 순수한 상상에서 출발하는 판타지와 달리, SF는 과학적 원리가 근거가 되지요. 과학이 발달된 어느 시점의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SF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테드 창의 소설은 특이합니다. SF의 문법을 따르되, 판타지에 가까운 생각의 씨앗에서 출발하기도 합니다. 천사가 종종 등장해 인간에게 흔적을 남기고 사람이 죽어 천당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 알 수 있는 세계('지옥은 신의 부재')도 있고, 별은 땅을 덮은 커다란 천정에 붙어 있고 탑을 높이 쌓으면 그 천정에 다다를 수 있는 세계('바빌론의 탑')도 있습니다. 이름만으로 진흙 인형을 움직이는 힘이 있고 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학문인 세계('일흔두 글자')는 연금술을 연상시킵니다. 그렇기에 테드 창의 작품을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 부르지 않고, 더 넓은 분류인 상상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 부르는 게 이해가 됩니다. 


테드 창은 흥미로운 작가입니다. 스물네 살에 '바빌론의 탑'으로 데뷔하며 최연소 및 데뷰작으로의 최초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네뷸라 상을 받았고, 휴고상 후보에도 오릅니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온갖 상을 휩쓸었고, 최근에는 그의 대표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가 '컨택트(원제 Arrival)'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 또 다른 작품인 '이해'도 영화화 준비 중이라고 하네요. 이 정도면 전업 작가로 나서도 충분할 텐데, 기술 매뉴얼 작가라는 직업을 유지하며 25년 동안 13개의 작품만 발표했습니다. 대부분 단편으로요. 이중 8편을 엮은 작품집이 '당신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당신과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이라고 해야겠죠.  


8편의 이야기를 짧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바빌론 시대의 세계관으로 바벨탑 이야기를 SF로 썼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바빌론의 탑'

-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지적인 유희 '이해'

-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명제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 '영으로 나누면'

- 흔한 외계인 이야기에 담긴 현란한 언어학과 운명론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

- 이름에 물리적 힘이 있다면 - 연금술이 연상되는 '일흔두 글자'

- 건담 만화 같은 상상 속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 '인류 과학의 진화'

- 신과 지옥이 현실적 증거를 보여준다면 모두 신을 믿을까란 질문 '지옥은 신의 부재'

- 기술을 통한 (의식 발전의) 지름길이 존재할 수 있을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작품 하나하나 탁월합니다. 참신하다는 표현이 진부할 정도로 새로운 (때로는 비과학적인) 세계관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치밀하게 과학적으로 사유하며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작품마다 제시되는 과학, 언어학, 혹은 수학 등의 학문도 정교합니다. 예를 들어 이름에 힘이 있다는 마술 같은 이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분석기법을 사용합니다. 빛은 최고로 빠른 길을 따른다는 페르마의 원리를 목적론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는 철학적 성찰이 느껴집니다. 모든 이야기가 지적 호기심을 유감없이 자극하며 꽤나 유쾌하게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묵직한 인간사의 다양한 질문을 안깁니다. 


아쉽다면 몇 작품에서 한껏 이야기를 부풀려 놓고는 급하게 쓸어 담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발상이나 전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운데 갑자기 끝나버리면, 재밌게 보던 드라마가 사정상 조기 종영하는 느낌처럼 허탈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모두 충분히 뛰어납니다.  


개인적으로 테드 창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라는 작품입니다. 타임 슬립 물인데, 과거와 미래가 치밀하게 영향을 주며 결국 과거와 미래는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천재!'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습니다. 


조만간 그의 두 번째 작품집이 나온다고 하네요. 바람이 있다면 장편 하나 써주었으면 합니다. 그가 만들어 내는 긴 호흡의 이야기는 어떨까 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화 덕에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소설 쓰기에 집중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진 작가라 장편을 기대하긴 어렵겠지요. 어쨌든 오래오래 이야기를 만들어주기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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