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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아르 Sep 19. 2017

느림의 미학

미국의 레코드 가게에 오랜만에 들른 사람은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게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비닐 레코드(대부분 LP인)입니다. 예를 들어 보스턴에서 레코드를 구입하려면 뉴베리 코믹스를 많이 사용하는데 가게의 중심은 오래전부터 CD가 아닌 LP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즈 앤 노블이나 다른 레코드 가게에서도 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한 지 한참 되었고, 스마트폰 카메라의 해상도가 필름을 능가하는데도 필름 카메라의 수요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중단되었던 필름 공장이 다시 살아나기도 합니다. 피카소나 헤밍웨이가 썼다는 몰스킨 노트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고, 만년필을 찾는 사람도 꾸준합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는듯한 이런 모습은 주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다룬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LP나 필름 등 아날로그로의 회귀 현상에 대해 소개하고,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해 분석한 책입니다. 저자인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가 디지털이 줄 수 없는 ‘진짜’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손에 잡히는 ‘무엇’이 주는 실체감은 디지털이 주도하는 현시대와는 다른 ‘힙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힙하다는 말은 '개성 있게 멋을 내다'는 뜻입니다.) 오프라인 매장이 온라인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내는 것도 한 가지 이유입니다. 애플 제품을 가장 비싸게 사는 애플스토어를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온라인으로 성장한 아마존이 계속해서 오프라인 서점을 만드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필요는 온라인만으로는 채울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 책을 읽고 오랜만에 미니디스크(MD)를 꺼내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MD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유행했던 매체입니다. 손바닥 정도 크기의 사각형 디스크에 앨범 한 장을 녹음할 수 있지요. CD 플레이어와 광케이블로 연결해서 녹음을 해야 하고 MD 하나에 담을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지요. 여러 면에서 불편합니다. 그렇기에 MP3 플레이어에 자리를 내주었지요. 그런데 이런 불편함이 마음에 듭니다. 신경 써서 MD 한 장씩 녹음을 하고, 그렇게 준비된 MD 중에서 몇 장을 선택해서 출근길에 들고나갑니다. 디지털 플레이어에 고음질로 몇천 장의 음반을 저장하고 맘대로 선택해서 들을 수 있음에도, MD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불편함 때문에 오히려 음악이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좋았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LP 열풍을 LP의 전성기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10~20대가 주도하는 걸 보면 아날로그 회귀 현상을 쉽게 복고라 단정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주는 즐거움을 사람들이 재발견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날로그가 주는 적당한 불편함에 ‘느림의 미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여유 있는 토요일 아침이면, LP를 골라 먼지를 닦아내고 턴테이블에 올려 음악을 들으며, 종이 노트에 만년필로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게 적은 글이 랩탑을 켜고 그 안에 저장된 음악을 들으며 타이핑하는 글과 별로 다른 내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날로그가 주는 풍성함이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느림'이 아름다운 순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저는 특허 쪽에서 일을 하기에 기술의 변화를 누구보다 실감합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기술들이 매일 생겨납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의식적으로 느림을 추구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번 주말에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을 꺼내 보는 건 어떨까요. 예를 들어 LP를 듣거나 노트에 손글씨를 쓰거나 필름 카메라를 꺼내 보는 건 어떨까요. 자녀나 친구들과 오랜만에 보드게임을 해도 좋고요.


아날로그가 주는 불편함 속에 빠르게 움직이던 몸과 마음을 멈추면, 바쁨 속에 지나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입니다. 제가 MD를 꺼내 들으며 음악 듣는 즐거움을 다시 발견했듯이요. 이런 시간이 누구에게 필요합니다. 누구 말대로 저희 몸은 아날로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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