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빚어가기 세 번째 이야기
성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삶이 어렵다는 것을 직면하고 해결하라는 명제는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공부 못해요? 안 해서 그래요. 승진에 실패해 속상하죠? 열심히 안 했잖아요. 너무 쉽게 단정하는 자기계발 강사들의 단언은 얄밉게 들립니다. 아무도 너를 동정하지 않는다. 너의 인생은 너가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은 각자 알아서 살아내라 요구합니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기술과 시스템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적은 인원으로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평균 수명도 올라갔고 나이 들어도 일할 힘은 충분합니다. 대기업의 독점은 더 커져 중소기업에 대한 배려는 줄어듭니다.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이제 사회에 들어서는 청년들은 어느 때보다 힘들게 시작합니다. 반면 일찍 경쟁에서 밀려난 가장들은 오랜 시간 가족 부양에 허덕입니다. 이런 사회적 요인을 무시하고 '개인의 책임'만 강조하는 것을 보면 부아가 치밉니다.
그게 다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국가의 책임은 외면하고 개인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 세상이 문제 아닌가. 투잡 쓰리잡 뛰어도 학자금 융자 겨우 갚는 상황에 무슨 목표고 비전인가. 맞습니다. 모든 책임을 개인이 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조건으로 경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의 힘든 상황이 모두 당신의 잘못 때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두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질문해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현실적인 대안이 무언가 말입니다. 세상과 환경을 욕하며 하루 하루 겨우 살아가는 건 답이 아니겠지요. 또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지도 않습니다. 다들 삶의 어려움을 품고 해결책을 찾으려 애씁니다. 남이 해주길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요. 결국 내 안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하려 합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은 제게 트라우마였습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던 세평 남짓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았던 시간. 문지방에 앞 발을 올려놓고 빤히 쳐다보던 쥐의 눈망울. 등록금 못 가져 가면 학교 안 간다던 누나의 책을 찢으며 통곡하시던 아버지. 그런 기억들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번듯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셨던 부모임에 대한 원망도 깊었습니다. 난 돈 욕심 없다고 돈 좇아 직업 선택하지 않겠노라 말했던 것도 그런 경험을 외면하기 위한 반작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릴 때야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짐입니다. 결심했지요. 십오 년 후의 내 모습은 온전히 내 책임이라고. 그렇게 결심하고 어느새 8년이 지났네요.
코비의 일곱 가지 습관은 '주도적이 되라'로 시작합니다.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선택할 수 힘이 있음을 뜻합니다. 작용이 주어질 때,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가 선택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에게 영향을 주는 영역인 '관심의 원' 대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향력의 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바꿀 수 있는 것에 노력을 기울여야 효과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상황이 나를 지배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식이라고 하지요. 스스로의 생각을 검증하고 잘못되었으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어진 상황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온전히 각자의 몫입니다.
둘째, 성숙한 삶의 범위를 더 크게 잡아야 합니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성숙한 삶의 목표는 아닙니다. 성숙은 훌륭하게 살기 위한 여정입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삶은 자신만을 위한 삶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관심의 원'과 '영향력의 원'을 다른 각도로 보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잊어버리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일, 가족, 돈, 공부 이런 일에 집중하고, 정치나 국가 경제,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불의는 영향력 밖이므로 신경 쓰지 말라고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삶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에 노력하지 않아 실패하는 이는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맞물려 시야를 개인으로 국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성장의 문제를 둘 중 하나의 택일로 본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양자택일은 아닙니다.
짐 콜린스는 그의 책 <Build to Last>에서 '그리고의 천재 (Genius of the And)'라는 말을 소개합니다. 위대한 기업들은 핵심 분야를 공고히 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며 한쪽의 시각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콘텍스트는 다르지만, 같은 말을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사회대 개인의 대립구조만 바라보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예를 들어 청년실업을 해결할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지 아니면 국가와 기성세대에게 있는지 둘 중 하나의 답을 요구한다면 답이 잘 안 나옵니다. 물론 청년실업은 국가와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은 가만히 있어도 될까요? 국가가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할 책임이 있다면, 개인은 그 상황에서도 자신을 성장시킬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시각과 개인의 시각 둘 다 중요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영향력의 원'을 확장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적더라도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통해 '영향력의 원'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오랜 기자 경력을 바탕으로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단체에서 활약할 수도 있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사회적 불의를 없애기 위해 정치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배워서 남주냐'라는 이기심을 '배워서 남 주려'는 마음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노력. 단점을 알고 극복함으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도울 수 있게 성장하는 노력. 사회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며 자신을 성장시켜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그런 노력. 모두 필요합니다. 나에게서 출발하지만 내 안에서만 멈추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다 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지만, 그 문제들의 해결은 내가 시작해야 합니다. 항상 내가 출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