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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15. 2020

어느 작가의 문제적 생각(팩션) #2

팩션 = 팩트 + 픽션(허구)


20년도 훨씬 넘은 그러니까 쓸모를 잃은 DVD 타이틀 한 장을 우연히 책장에서 꺼냈다. "hell freezes over?" 지옥이 얼어붙겠다고? 절대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차갑게 굳어버린 타이틀을 살려 보려고 플레이어에 넣어봤지만, 재생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 맞아, 이 타이틀은 지역 코드 1이었어. 미국 사이트에서 직구로 구매한 타이틀이었잖아. 근데 이 타이틀은 그동안 어떻게 재생이 되었던 걸까? 들리지 않는 소리가 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채, 타이틀 만지작거렸고 먼지들을 털어냈다.


기억들은 하나에서 시작되어 다른 장면들을 연거푸 꺼내 들었다. 오디오 숍을 찾았던 어떤 편안한 오후, 누군가 현장과 같은 음을 들려주겠다며 "hell freezes over?"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던 기억, 돈 헨리, 조 월시, 그리고 이제 세상을 떠난 글렌 프라이까지. 모든 장면들이 한꺼번에 기억에서 되살아났지만 플레이어는 "재생할 수 없는 지역 코드입니다"라는 따분한 말과 함께 장면의 소환을 거절했다.


어떤 노력으로 기억을 복원할 수 있을까.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은 남아 있었지만, 수고스러움과 직면하기는 싫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세상에서, 미니멀리즘을 위해 온갖 물건을 버리고 재활용 센터에 내다 파는 행위들, 비루하다고 여겨진 물건들의 마지막 장면이 눈앞에서 현실처럼 재생됐지만, 모든 기억은 불가항력적으로 불태워지고 말았다. 기억이란 불편하고도 투정을 빈번하게 일으키는 녀석이다. 그것들은 선택적으로 보관되고 불규칙하게 사라져 버리지 않나.


어떤 물건은 우연을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아주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힘겹게 길어 올리다, 밧줄이 끊어지거나, 겨우 끌어올렸더니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듯이, 기억은 화학반응을 일으키다가도, 잠잠하게 풀어지기도 한다. "이런 쓸모없는 타이틀은 재활용장에 버려져야 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다, 음원 사이트에서 이글스의 앨범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미혹되어 우리는 의식 없이 물건을 버린다. 왜 물건은 반드시 버려져야 하는 거지? 그러면 기억도 같이 버리면 안 돼? 맥시멀리즘은 반대편 낭떠러지에 꼭대기에 서서 위태롭게 바닥을 내려다본다. 나는 그 둘의 사이에 앉아서 지난 싸움을 응시하지만, 어느 쪽도 응원하지 않으련다.


나는 문제적 타이틀을 손에 들고 재활용장으로 내려갔다. 타이틀을 손에 들고 몇 번을 주저하다, 멀쩡한 표정으로 쓰레기 더미에 녀석들을 던졌다. 잘 가라는 말도 없이 어떤 숙명적인 이별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냉정하게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길, 옆 동에서는 이삿짐을 싣는 트럭이 보였다. 흔하디 흔한 익스프레스라는 단어조차 찾아볼 수 없는, 페인트칠이 여기저기서 벗겨진 1톤 트럭 한 대가 보였다. 그 순간, 앓던 이가 빠져나가는 느낌, 타이틀을 재활용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릴 때 느끼지 못한 전율이 일어났다.


"그래, 분명 몇 달 동안 우리 단지를 괴롭히던 인간이 이사 가는 게 분명해. 저 소심하고도 낡아빠진 트럭에 올려진 짐들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불경을 틀어놓고 온 아파트 주민들의 신경을 거스르게 했던 그 문제적 인물이 떠나가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오늘 밤도 글을 쓰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트럭은 말썽 많은 3호 라인의 5층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화단에 앉아, 트럭에 앉을 305호, 그러니까 낯선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싶었다. 오래도록 앉아서 단풍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숨 막히는 광경을 구경하면서도 신경을 예민하게 가다듬고 그 남자가 나타나기를 계속 기다렸다. 나는 그 305호가 불경을 틀며 걸어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래야 그가 그토록 내가 혐오하던 305호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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