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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08. 2020

마음의 눈으로 당신을 봅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덕분에 평소보다 눈을 유심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타인의 눈을 호기심으로 보는 일은 저에게 일종의 작가라는 직업병이자 마음의 배출구인 셈입니다. 하지만, 마스크는 우리에게 더욱 깊은 침묵을 오래도록 유지하길 권장합니다. 이러다, 어떤 기관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지 못합니다. 어떤 기관은 스스로 퇴화되고 어떤 기관은 반대로 더 활력이 생길 것입니다. 저에게 눈은 그러한 존재입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소화하는 최후의 관문, 당신과 내가 동시간대에 존재한다는 증거,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빛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까지 심어줍니다.


관찰은 눈에서 흡수하여 다시 눈으로 배출됩니다. 좋게 말한다면 습관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저는 눈으로 당신과의 나의 거리를 산정합니다. '우리는 10미터쯤 떨어진 사이네요.', '우리에겐 적어도 100미터쯤은 확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라인에서나 허용되는 사이입니다.' 이런 말을 당신에게 여과 없이 눈으로 전송하고야 맙니다. 따라서 멀리 이격 되어도 아니 다른 공간으로 분리되어도 당신과 내가 떨어진 길이의 깊이와 폭, 그리고 생각의 울림까지 눈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일은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회의실에서도 나아가 눈을 감아도 여전히 이어집니다. 물론 눈 이외에는 그 어느 곳도 관찰할 수 없습니다. 오직 눈으로 상대방의 입꼬리, 볼의 움직임, 근육의 윤곽을 상상할 뿐입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눈만 더 혹사를 당하는 것입니다.


상상이라는 단어를 활용하니 우리는 상상 속에서나 가끔 만나는 사이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오직 눈으로만 대화하는 셈이니, 눈에게 더 막중한 책임을 맡겼으니, 우리는 가깝고도 먼 사이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높은 담장이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마음을 넘어가지만, 마음 때문에 관계가 허물어지기도 합니다. 그 틀어지는 현상도 역시 마음에 만들어낼 테지만.


하지만 저는 당신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눈에 내 얼굴을 담을 수 있으니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소유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속으로 눈의 세계를 설명합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눈 속에서 미소 짓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나는 눈을 떠도 감아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제 눈을 계속 바라봐 주세요'라고 눈으로 말합니다.


어제는 쇼핑을 하다, 문득 눈을 건강하게 만들어준다는 루테인을 구입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위적인 것들로 눈을 포장한다는 사실이 불편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하여 돌연 영양제를 선택하려던 손을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리저리 카트를 끌고 다니며 찾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찾는 물건이 있을 거라는 태도로 또다시 마트를 배회했습니다. 지나다, 블루베리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저에게 '블루베리가 눈에 참 좋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 어딘가에서 떠돌던 그 장면을 눈으로 회복해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기억도, 낮고도 깊은 저 너머의 장면도 제 마음에 분명히 각인됐으므로 저는 태연하게 블루베리를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눈에 좋은 식품, 그렇습니다. 블루베리는 눈에 좋답니다. 제 장바구니에 자리를 잡은 블루베리는 1차적으로 제 눈을 회복시킨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눈이 건강하니 눈에 좋은 식품을 찾을 호사를 누린 것입니다. 저는 행복한 사람인가 봅니다. 눈이 멀쩡해서 마음속에 저장된 장면을 깨끗하게 꺼낼 수 있으니, 모든 장면에서 당신의 지난날을 확인할 수 있으니 제 눈은 본분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피곤해서 눈을 감겨져야 합니다. 눈을 감으면 광막한 어둠만이 눈앞에서 위용을 보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제 눈이 비로소 사라졌다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살아서 속에서 움직입니다. 부산하게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해명할 수 없는 나의 이러한 불안은 유효기간이 짧을 것입니다. 세상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잠시 제 눈이 감겼을 뿐이라는 사실에 불과하기에, 불안감도 두려움의 증폭도 찰나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곤란스러움은 곧 잦아들 것입니다.


눈을 볼 수 없는 환경에서도 눈을 생각하게 만드니 제3의 눈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게도 합니다. 눈은 한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데,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눈은 어떨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오직 상상으로 소환 가능한 당신에게 대답을 원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엔 제 자리가 있나요? 저는 당신에게 거울인가요?'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침묵으로, 아니 눈으로 '이해하면 날 볼 수 있어요? 제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당신의 말은 내 마음에서 번역이 됩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눈은 스스로를 소모하기 시작합니다.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눈이 먼저 번쩍 뜨이고 무거운 몸이 작동하면 눈은 더욱 바쁘게 활동합니다.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은 느리지만 눈에게 순응합니다. 눈은 자신이 바쁘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지합니다. 당신이 보라고 지시한 곳을 기꺼이 쳐다봅니다. 이를테면, 창밖의 순수한 겨울의 시작을, 어둠의 굉장한 변화를, 책상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발화를 목격합니다. 모든 장면을 목격하는 눈이야말로 세상에게 영양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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