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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24. 2021

위로 꼭대기로 높은 곳으로 하루키에게로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은 나쁘다, 그런 유가 아니야. 흐름을 거역하지 말고, 위로 가야 할 때는 위로 가고, 아래로 가야 할 때는 아래로 가야지. 위로 가야 할 때는 가장 높은 탑을 찾아서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되고, 아래로 가야 할 때는 가장 깊은 우물을 찾아 그 바닥으로 내려가면 돼. 흐름이 없을 때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고. 흐름을 거역하면 모든 게 말라 버려. 모든 게 말라버리면 이 세상은 암흑이지.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도 하루키 책을 읽는다. 버스에서 지하철까지, 걸어갈 때는 어리석게 비칠지도 모르니 굳이 읽지 않는다. 쓰러질지도 혹은 고꾸라질지도 모르므로,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루키에 빠져들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그러니 동작이 멈춘 상태에서나마 간신히 100퍼센트 상태로 정신을 끌어올리곤 무신경하게 그의 책에 뛰어든다. 하루키에게 중독된 것이 맞을까? 아닐까? 나도 모르겠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난 이미 여기에 빠졌다. 어쨌든 걸어 다니는 도중, 내 왼손이나 가방 바깥쪽 주머니엔 하루키의 책이 언제든 대기 중이긴 하지만.


8호선 복정역에서 분당선을 갈아타는 구간엔 하루키와 함께 하기에 제격이다. 물론 그 구간엔 하루키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도 칼 세이건도 양장본이건 문고판이건 어느 작가의 책이든 다 어울리겠지만... 하여튼 복정역 환승 구간은 이동 구간도 짧을뿐더러, 사람들의 출몰도 한산한 편이어서 독서에 이렇다 할 방해를 덜 받는 편이다.


아무튼 나는 왼손으로 그의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작은 샤프(지름 10cm)를 들고서 어디에 밑줄을 칠 것인가, 고심하며 플랫폼 앞에서 설사 다음 열차가 몇 시간 이후에 도착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으니 무한 대기할 뿐이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이른 - 분명 70페이지쯤 읽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120페이지에 이르렀다던가, 분명 복정역이었는데 갑자기 모란역에 도착했다던가 - 상태가 되면 사라지는 것이 지하철 창밖으로 자꾸 버려진다. 사라지는 것이 늘어난 만큼 나는 더 많은 것을 채웠다는 생각에 뿌듯해지지만, 간헐적으로 시간을 잃어버리는 행태가 과연 건강에 이로울까 걱정이 앞서기도.




모란역에 갑자기 도착, 스크린 도어가 열리는 동시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바깥으로 쏟아진다.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도착한 사람에게 경품이라도 지급하는 건지 나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달아나는 듯 탈출하는 흐름에 합류하고야 마는 나는, 하루키의 문장처럼 올라가야 할 때는 역시 위로 가야 한다는 말이 진리라는 걸 넌지시 깨닫고야 마는데, 그 감정의 유효기간이 저 짧은 높이의 에스컬레이터의 길이만큼 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흐름을 거역하지 말라고 했으니 나는 흐름의 박자에 몸과 마음을 맡겨 본다. 커다란 손수레에 비닐을 칭칭 휘어감은 키가 유난히 작은 할머니가 흐름을 잠시 끊는다. 에러다, 시스템에 문제가 일어났다. 사고가 멈추고 만 것이다. 규칙적이고 역동적인 동작이 그 앞에 멈추어서는 그러니까 질서가 교란되는 사태에 봉착한 것이다. 물론, 원하지 않아도 일정한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더라도 몸은 꼭대기로 또다시 꼭대기로 이미 높은 곳에 올라있다. 기다리다 겨우 당도하고 보니, 이 높이라면 하루키가 말한 꼭대기쯤은 되려나. 아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더 빠르게 더 높게 가열하게 나아가야 한다. 경쟁자를 뒤로 보내고 그들보다 적어도 반걸음은 앞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배운 대로, 교과서에 기록된 대로 경쟁하는 자세를 잃으면 안 된다.


흐름이 없는 상태가 끝나고 인위적인 흐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상태에 진입한다. 하루키의 책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바이블이 된다. 위로 오를 때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야 한다는 그의 지침에 따라 나는 또 다른 차원의 몬스터, 빌어먹을 에스컬레이터와의 2차 작전에 뛰어들어야 한다. 자, 이번에는 자연이 만든 질서에 인공적인 것을 가미시킨다. 이제 흐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할 때다. 긴장되고 경직된 근육이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하게 일어나지는 못하니, 죽은 기세를 겨우겨우 일으켜 세운다. 보라! 저 높은 곳에, 50미터쯤 앞에 꼭대기가 살짝 보이지 않는가. 고지다, 힘을 내자, 터널의 끝이 보인다. 저곳이 바로 승자만이 맛볼 수 있는 세상이다. 내가 닿아야 할 곳, 그토록 원하던 높이, 아래와 다른 공기가 흐르는 그 이상의 언덕이 눈앞에 있다.


봐라, 잠시 기운을 잃고 질서를 거역하자, 하루키가 말한 대로 모든 게 말라버리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흐름에서 어긋난 부작용, 그 대가가 이렇게 무섭고 혹독한 것이다. 하루키의 가르침을 부디 잊지 말자. 이왕 위로 올라야 한다면, 그 의미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모순이라 부정하지 말자. 그게 전부다. 삶은 전쟁이다. 하지만 전쟁은 잠시 끝났으니 나머지를 읽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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