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찾아 멀리 먼 곳으로 떠나자고

이제 절대 멈출 수 없어.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어릴 적, 아마도 국민학교 2학년쯤 부근이다. 어쩌면 3학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내가 어느 시점의 기억을 지금 이 순간으로 끌고 왔다는 게 중요하니까. 아무튼 나는 남한산성 중에서도 비교적 평탄한 산등성이 부근에 있었고 그곳에 간 이유는 아마도 소풍인 것 같다. 그래, 분명하다 소풍, 어쩌면 현장 학습일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이란 건 대체 왜 이렇게 자꾸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왜곡이 되는 걸까. 왜곡되는 기억력 탓에 글을 쓰는 걸까. 그렇다면 글을 쓰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모자란 기억력을 보완하고 있을까. 그냥 잊히게 내버려 두는 걸까. 그깟 국민학교 시절의 소풍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과할 테니까? 오래된 기억력일수록 더 쉽게 폐기 처분되는 건가? 그게 인생의 수순인가? 이런 건 나에게만 필연적인 현상에 해당되는 걸까.


그 시절의 기억으로 환기된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어느 순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실천했을 뿐이고 마땅한 소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 쓰면서 '때문이다', 라는 말을 극도로 혐오하는 편인데, 가끔 법칙에서 어긋나는 나를 본다. 내가 만든 규칙을 깨면서 나름의 합리화를 시도해보는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했다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대부분은 자신과 약속해 놓은 사실을 쉽게 저버리고 무심한 척 신경조차 쓰지 않으니까.


그날의 나는 문제적인 나로 살았다. 무언가 실마리가 될 것 같은 가정에 꽤 집착해있었달까. 참 고상하고도 거창하게 이야기를 시도하려 하는데, 그 실마리와 집착의 대상은 보물 찾기였다. 소풍이 마감되는 시간이 되면, 그러니까 한 여름의 태양이 아주 높은 곳에서 자신의 무게를 발산할 시점이 되면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이 보물 찾기에 나섰다. 그 보물은 물론 선생님의 주도하에 숨겨졌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다만 하얀 작은 종이에 뭔가 좋은 게 담겨 있다는 말씀, 그것이 곧 선물로 직결된다는 의미 하나에만 우린 집중할 뿐이었으니까.


선생님이 시작을 알리면 우린 목적 없이 뛰어나갔다. 어디까지 가야 할 것인지 몰랐지만 갑자기 게임이 시시해져서 우린 왠지 먼 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풀숲을 지나고 물뱀이 출몰한다는 낮고 검푸른 개울을 건너고 중간 계곡에서 목적은 잊고 가재 잡기 놀이에 열중하다가 우리가 보물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알아차리고 경쟁이라도 할 듯이 멀리멀리, 선생님으로부터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치려 노력했다. “보물이란 건 발 밑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보물은 멀리 여행을 떠나서 획득해야 의미가 있는 거라고”, 우린 바깥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또한 행동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어쩌면 우리는 선생님이 어른으로서 목격하는 세상,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차이를 인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거리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 세계인지 우린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단지 보물 찾기라는 수단으로써. 주관적인 세계가 객관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길 기대하며.


똑똑한 아이들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편이었다. 스스로는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몇 수를 내다 불 줄 안다고 착각까지 한 것 같다. 그렇게 원래의 장소에서 어디인지도 모를 오솔길을 따라 풀숲을 더듬고 헤쳐가면서, 가시에 찔리고 강아지풀로 서로의 코를 간지럽히는 장난을 치다, 어는 순간 뒤를 돌아보면 선생님과 나머지 아이들은 까만 점으로 언뜻언뜻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아주 높지만 여린 메아리처럼 퍼져나가는 선생님의 부름을 듣고서야 겨우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건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그것이 보물이었다는 정보 자체는 이미 시력을 잃었다. 찾아야 하는 물건보다 찾는다는 행동에 더 열중하게 됐으니, 나중에는 목적은 그다지 의미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복귀하면 나와 몇 녀석, 그러니까 함께 모험에 동참했던 다소 기이한 기질을 가지고 있던 녀석들을 제외하곤 모두 무난하게 그리고 선생님의 주변에서 보물을 찾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보물이 꽤 시시했다. 보람도 없었다. 공책이나 연필, 지우개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뭔지는 모르지만 그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고.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성장하면서 나는 여전히 보물 찾기를 하고 다니고 있다고 믿는다. 원래 서 있던 위치에서 벗어나서 오랫동안 어쩌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여행에 빠져있다고. 여정의 끝에 무엇이 숨어 있을까. 얼마나 더 멀리 가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보물을 찾을 수 있을까. 덤불을 헤치고 작은 관목들을 넘고 크고 작은 돌덩어리를 놓은 계곡을 넘어서 무작정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면 하면 그 정상에서는 보물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줄까. 이쯤 되면 나의 여정은 보물 찾기에 국한하지 않는다. 더 이상 놀이도 아니다. 이것은 그냥 싸움이다. 찾을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어쩐 명제를 내려놓고 그 명제가 사실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건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단지 도달하는 게 중요하다. 멈추지 않고 숨도 헐떡거리지 않고 줄기차게 보물 하나만을 생각하면서 설사 내가 이미 그 장소에 도달했거나 통과했을지라도, 그 사실을 부정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방법뿐이다.


찾는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내 소유물로 만든다는 것, 어쩌면 내가 찾는 실체가 계속 바뀌어간다는 게, 보물 찾기가 늘 실패로 남은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래서 글을 쓰고 있다. 머나먼 과거, 내가 이미 통과해왔을 그러니까 보물이 여기 있어,라고 짐작했던 장소를 확인해놓곤, 그 돌멩이 밑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 사실 선생님은 보물을 숨겨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보물은 내 안에 있다. 이곳에 숨어 있다. 손을 펴, 그리고 넓게 뻗어봐. 네 손에 든 네 보물이 여기 있다고. 하지만 나는 부인한다.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보물은 세상에 없다고. 반드시 내가 만들고 내가 찾아 획득할 것이다. 이미 멀리 왔으니 멈출 수 없다. 찾기 시작했으니 끝을 맺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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