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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27. 2021

이제 사람이 버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신나는 글쓰기 5기 미션 : 문장 패러디하고 이어서 쓰기

"이젠 그림이 수채화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중에서


* 픽션입니다.


  전산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지 오늘로서 만 1년이 지났다. 너무나 간절하게 입사하고 싶은 회사였고 근무조건도 꽤 만족스러웠다.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정확하게 퇴근, 1년 동안 야근한 날이 손꼽을 정도로 일과 삶의 밸런스가 잘 맞는 곳이었다. 게다가 대기업이라서 꽤 안정적인 편이었으며 급여도 신입사원 치고는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별다르게 처리할 일도 없었다. 머리를 쓸 일도 없었다. 단순하게 매일 고정적으로 처리하는 그런 따분한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내가 하는 일이라곤 중앙 서버 시스템의 정상 작동 여부 그러니까 어떤 프로세스가 살아 있는지 ‘ps -ef …’ 이런 명령어 따위를 날려서 혹시 프로세스가 죽어 있다면(다운됐다면) 다시 살리는 일 - 이런 것도 스크립트로 자동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수동으로 딱히 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 항온 항습기의 상태 체크, UPS 배터리 상태 체크, CCTV 모니터링, 전산실 내부 온도가 2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건 아닌지 환경만 잘 체크하면 됐다.


  그러니까 나는 전산실의 지박령이 된 셈이었다. 처음엔 한가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날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무료한 일상에 적응되어가는 나 자신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편안하고 평화로우며 - 사건, 사고가 거의 없음 - 시간이 남아돌아서 좋아야 하는데, 점점 그런 생활이 따분해지는 바람에 다른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동기마저 점점 잃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바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몇 백 데시벨이 넘을 소음으로 가득 찬 서버실, 20도 이하인 기계뿐인 서늘한 공간 뒤편 어딘가 숨어서 낮잠을 즐기는 나를 발견하곤 그 심증이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어떤 노력의 가치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무료함에 그만 적응해버린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전산실 소굴로 진입한 후, 수천, 어쩌면 수억이 넘을 운영 시스템의 상태를 확인하곤 다시 어제 읽던 개발 서적의 첫 페이지만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그런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를 바 없는 무료한 생활, 나는 그런 하루가 좋으면서도 싫어졌던 것이다.


  도전, 낯선 분야를 개척하는 일은 점점 나에게서 멀어졌다. 따분함에 빠져 있으면 모험의 가치는 훼손당하고 만다. 변화가 필요했지만, 변화는 나와는 거리가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어쩌면 깊은 심해 속으로 침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시 건져 올릴 수 없는,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만.


  그러던 어느 날, 무료함을 박살 낸 사건이 터졌다. 그룹사 부회장실 비서로부터 긴급 전화가 한 통 걸려왔던 것이다. 내용은 어제까지 문제없던 오피스 프로그램이 정상 작동하지 않는다나, 뭐라나. 별 관심도 없는 오피스 프로그램 따위라니, 그런 사실을 왜 전산실에, 그것도 서버 모니터링을 책임지는 중대한 담당자에게 통보한 것이었는지, 나는 당최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식을 전달받은 김대리는 나에게 의뭉스러운 지시사항을 내렸다. 


  “서버 다루느라 따분하지 않아? 가끔은 이런 엉뚱한 일을 하면서 기분 전환하는 게 어때? 게다가 그룹사 부회장님의 지시사항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잖아. 우린 콜이 왔으면 어쨌든 나가서 해결해주는 게 원칙이니, 일단 가서 한 번 보고 오는 게 어때?”


  “정말로 가서 보고만 오면 되나요?” 나는 다소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리고 최대한 삐딱한 자세로 질문을 던졌다.


  가서 보고 오라니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현재는 코딩을 전혀 하지 않고 있지만, 난 그래도 전산학 전공자가 아닌가. 오더 한 대로 명확하게 따르는 컴파일러처럼 나도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할지라도 그 오류를 해결할 솔루션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혹은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문제점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내 사전에는 오피스 따위가 가진 버그의 해결책은 없으니까. 게다가 내가 왜 부회장의 오피스의 이상 작동 상태, 그런 예외사항까지 고려해야 한단 말인가. 내 매뉴얼에는 적어도 없다.


  그럼에도 김대리의 지시사항을 따라야 했다. - 그런 면에서 직장은 군대와 다를 바 없다 - 그와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신경질적으로 37층 버튼을 눌렀다. 꽤 오랫동안 시간이 멎은 것처럼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갔다. 부회장실에 막 올라갔을 때, 비서는 바쁜 사람처럼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으로 윙크하듯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잠시 의자에 앉아 대기하라는 그런 시선 말이다.


  통화가 끝난 후, 나는 부회장실 안으로 인도됐다. 마치 나는 범행 현장을 탐방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급습해서 범인을 체포하고 현장의 물증들을 보관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망연자실한 부회장의 얼굴이 보였다.


  “엑셀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아니, 어제까지 여기에 있었는데 안 보이네. 오늘까지 예산서를 검토해야 하는데, 망쳐버렸어. 너희들 전산실 업무 담당자들은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사라져 버린 엑셀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엑셀이 사라졌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엑셀이 사라졌다면 내 상식으로는 프로그램을 부회장이 직접 삭제했던가, 멀쩡하게 작동하다 갑자기 원인모를 증상 때문에 다운이 되었던가, 이런 상식적인 문제점들을 떠올리겠지만, 부회장은 상식적인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예측한 것과는 정반대로 그러니까 비상식적인 길로 어긋나는 사람이 부회장 같은 류였으니까. 나는 침착하게 - 속은 비교적 타들어갔지만 - 그의 노트북을 들여다봐도 되겠냐고 질문을 했다. 아주 침착하고도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어서 말이다. 하지만 부회장은 덜컥 짜증부터 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전산실 그러니까 7층에 근무하는 내가 37층의 부회장실을 점거하고 그의 시스템을 장악한 다음, 그 문제적인 엑셀을 지워버렸다는 게 그가 어필하는 주장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는 그럴만한 해커도 아니었고 그의 시스템에는 나에게 이익이 될만한 그 어떠한 정보도 없었으므로 그의 주장은 망상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쪽도 저쪽도 아닌, 다소 중간계의 인물이 지을만한 표정, 그러니까 완벽한 무표정으로 그를 대했다. 그는 역정을 내며 오른팔을 공중으로 크게 회전하듯 스윙하더니 다시 아래쪽으로 내리찍었다. 아마도 그는 마우스를 클릭하려 했던 것 같다. 음, 마우스를 그렇게 회전하듯 스냅을 가해서 찍어내리면 사라진 엑셀이 소생이라도 하려나. 그런 일은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가출해버린 엑셀은 더더욱 더 그럴 기분, 즉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알 수 없는 언어를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끝에 겨우 해석해내곤 나는 어떤 예감을 안고서 휴지통을 열었다. 나는 이끌리듯 이해할 수 없지만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엑셀 아이콘이 곱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엑셀은 완벽하게 이 지구 상에서 자취를 잃었다고 그러니까 멸종되고 말았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창문 밖으로 노트북이 날아갈 것만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나는 뭔가 심각한 상황을 발견한 사람처럼 비장하게 미간을 찌푸리다가, 아이콘을 복원했다. 아주 말끔하게 엑셀 아이콘이 살아나서 바탕화면에서 반짝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왜 휴지통에 들어가 있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부회장님. 부회장님의 빌어먹을 손가락이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았겠지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편안하고도 안정적인 직장에서 퇴사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단답형으로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세상에는 인간의 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간혹 일어난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부회장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루하고도 반복적인 일상에 찾아온 어쩌면 에러 같은 사건, 사실 멀쩡한 건 시스템이고 이상한 건 사람이 아닐까. 나는 시스템을 감시하다, 가끔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예외 사항을 기계적으로 처리하곤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내는 결함에 대해서는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내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이상한 사건, 그러니까 엑셀이 바탕화면에서 사라져서, 변사체처럼 휴지통에서 발견되는 일은 그 후로도 일상다반사처럼 찾아올 테니까. 


  회사엔 부회장 같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김차장, 변부장, 이상무, 그리고 가장 높은 위치의 백회장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들은 시스템의 버그보다 더 윗 레벨인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아니 사람에게 잠재된 버그를 목격하곤, 이 세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스템에 가까워질수록 사람과 멀어진다고 믿었던 내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이 회사에 입사한지 1년이 되던 날,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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