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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28. 2021

아내가 가출했다 3

단편 소설

아내가 가출했다 1

https://brunch.co.kr/@futurewave/1206

아내가 가출했다 2

https://brunch.co.kr/@futurewave/1209

  



  1시쯤 됐을까. 문득 잠에서 깼는데, 등줄기를 타고 축축하고도 성긴 땀이 흘러내렸다. 선풍기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그런 질기고 거친 여름밤의 열기 속에서 나는 헐떡거리고 있었다. 공기 중에서는 더위가 푹푹 살찌듯 암흑의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서재를 떠나 거실 한복판에 큰 대자로 드러누웠으나 더위는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에어컨을 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두다간 내 몸이 수박처럼 반으로 쩍 갈라질 것만 같아서였다.


  리모컨을 겨우 찾아내곤 전원 버튼을 눌렀다. 3초쯤 지났을까? 시원한 바람 대신에 에어컨에서는 사우나에서 참았던 호흡을 크게 몰아쉬는 듯한 비유하자면 노인의 식식대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더운 바람만 나올 뿐이었다. 차라리 내 가슴을 풍선처럼 둥그렇게 말아놓았다가 바깥으로 배출하는 게 더 시원할 것 같았다. 


  리모컨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선풍기를 서재에서 가져왔다. 10년은 넘었을 신일 선풍기가 털털 거리며 회전을 했다. 물론 선풍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어느새 고장 나버린 바람에 회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형태로 스스로를 탈바꿈해버렸으니까. 세상도 나도 선풍기도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는 견딜 수 없는 형편이 되어가고 있으니까. 선풍기에게도 특별한 선택지가 없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눈은 감았으나 어둠 속에서는 등대처럼 계속 어딘가에 불빛이 비쳤다. 어떤 장면 그러니까 아내와 함께 했던 과거가 불쑥 나타났다가 가출한 아내처럼 스스로를 지워버렸달까. 그런 의미 없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안개 같은 장면이 겹쳤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참으로 뜨겁고 서늘한 밤이었다.


  눈을 뜨자 실핏줄 터지는 소리가 눈가에서 들렸다. 나는 그 부정한 기운을 잠재우려 찬물로 샤워를 하며 어떡하든 빨갛게 물든 기운을 깨끗하게 지워보려 애썼다. 이왕이면 아내의 기억도 말끔하게 지워지기를 바라며. 하지만 그런 감탄할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도 나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셈이었으니까. 물론 나는 이 집에 쓸쓸하게 폐기처분 되기를 기다리는 편의점의 도시락 같은 신세가 되긴 했지만.


  딱딱한 비누를 바른 다음 찬물로 오래도록 씻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냉기가 서리도록 그 기운을 벗 삼아 하루를 버텨볼 심상으로 말이었다. 씻고 나와서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대충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다시 마른 머리에 젤로 대충 모양새를 잡았다. 거실로 이동하여 냉장고에서 시리얼을 꺼내곤 나무 숟가락으로 한두 번 퍼내 접시에 담고 99% 두유를 반 정도 들이붓고 창밖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먹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시리얼이라는 식별 장치가 없었다면 내 입속에 들어간 것이 분필가루인지 시리얼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리라. 어쩌면 나는 분필 가루를 씹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서류 가방에 노트 그러니까 노트북이 아닌 것을 쑤셔 넣고 샤프를 하나 넣은 다음 작은 선풍기도 같이 넣었다. 점심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분명히 식대 제공이라는 말을 선배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비교적 멀쩡한 벨트를 장롱에서 꺼내곤 물방울무늬가 섞인 검은색 남방셔츠, 남색의 면바지를 입고 아껴둔 스니커즈를 꺼냈다. 그리고 스니커즈를 조심스럽게 신고 가방에서 휴대용 선풍기를 꺼내 오른손으로 잡은 다음, 스마트폰은 왼손에 들고 아파트에서 나오고 출입로를 따라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바로 버스가 도착했다. 몇 분 남았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제일 끝자리 구석에 몸을 밀어 넣고 천정에 달린 에어컨을 내 쪽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틀었다. 아주 시원한, 그러니까 상쾌한 바람이 남방셔츠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샤워할 때 아껴둔 냉기가 만나 환호성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몇 정거장을 지나니 답십리역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휴대용 선풍기를 2단계로 올리고 뜨끈한 바람을 맞으며 터덜터덜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5분을 기다렸다가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랐고 빈자리에 앉아 하루키의 책을 꺼내들었다. 해변의 카프카였다. 주인공인 다무라 카프카는 15살 생일날 가출했다. 내 아내는 35살에 집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39살에 직장도 잃고 아내도 잃은 남자였다. 나 역시 어디로든 가출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다. 나는 카프카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준비가 덜 됐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으러 그러니까 생존 투쟁에 나선 사람일 뿐이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지금은 그 무엇도 밤안개처럼 눈앞에서 부옇기만 하다. 무엇 하나 잡을 것이 없다. 아침에 일어났지만 부연 시선처럼 시간이 지나도 분명해지는 게 없었다. 책을 읽어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었다. 카프카도 사에키도 잠시 나타났다가 원위치로 돌아갈 뿐이었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 가야 할 곳을 모른 채 방황하는 셈이었다.


  여의도역에서 내려 다시 00회관을 향해 걸었다.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다만 몇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이 신용카드도 곧 종말을 맞게 될 테니까, 결제일까지 충분한 금액이 마련되지 않으면, 걷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교통수단도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 


  아침이었지만 걷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아침부터 30도를 이미 넘겨버렸다. 작은 선풍기를 3단으로 올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걷다 보니 00회관이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을 걸어서 5층까지 이동했고 복도 제일 끝에 있는 505호 문을 여니 분주한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일자리를 소개받아서 왔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알쏭달쏭 한 표정을 짓다,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사람처럼 한쪽 구석방을 알려줬다. '그리로 가보세요',라는 말과 함께. 나는 그렇게 끝방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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