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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23. 2021

아내가 가출했다. 2

단편 소설

아내가 가출했다. 1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소설은 나와의 또 다른 대화인 것 같아서 그 이야기를 듣는 자세로 써봅니다.




  아내는 100만 원을 남겨 놓고 떠나버렸다. 그 사건 때문에 아내는 이 집에서 아니 나에게서 완전히 독립한 셈이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수습해야 할지 나는 경험도 없고 경황도 없었다. 될 대로 되라고, 아무렇게나 세상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만세라도 불러야 했을까? 아내의 가출에 대해서? 내가 고립된 것에 감격이라도 해야 했을까?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태평하게 굴어야 했을까? 어쨌거나 나는 망했다. 직장에서는 정치 싸움 탓에 오래전에 잘렸고 게다가 돈은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아내가 준 100만 원이 있지 않냐고? 그게 희망이지 않냐고? 난, 그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죽더라도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굶어 죽는다고 해도 절대 그 돈은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어떤 확고함에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발언하면서도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하고 싶었다.


  “선배, 나야”

  “무슨 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잘 사냐? 네가 전화를 한 걸 보니 뭔가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선배와 나는 서로 잘 사는지 안부 따위를 물었다. 물론 나는 잘 살고 있지 않으므로 선배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배, 일 자리 좀 구해줄 수 없을까? 지금 내가 큰 고초를 겪고 있어서 말이야.”

  “뭐?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일자리를 구해달라니.”

  “아내가 집을 나갔어.”

  “제수씨가 집을 나갔다고?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제수씨가 나갔다니 이게 무슨 놀랄 소리야?”

  “그냥 그렇게 됐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 테니. 더 이상 묻지 말고 일자리만 좀 알아봐 줘. 어떤 일도 상관없으니까 말이야.”

  “어이가 없구먼. 알았어. 묻지 말라 했으니까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을게. 네가 나한테 연락해서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궁했나 보네. 그런데 알아는 볼 텐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 알아보고 나중에 연락해 줄게.”

  “고마워 선배"


  전화를 끊고 이 사태가 일어난 발단으로 돌아가 보려 했다. 아내가 밝힌 가출의 사유는 생각만큼 설득력이 없었다. 이 황량한 집안에 혼자 남겨 놨다니. ‘그것은 사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나? 힘들고 괴로웠을 때 내가 옆에 없었다고? 그러면 내가 힘들 때 자기는 내 옆에 있어줬나? 표현하지 않는다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고 힘든 게 없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나 역시 힘들었다고, 하지만 난 그런 걸 표현하는데 능숙하지 않은 남자라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힘든 게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지껄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내는 집을 나갔고 그녀의 평소 성격이라면 돌아오지 않을 건 확실했다. 아내는 늘 용의주도했고 한 번 결정한 사실을 과거로 돌리는 일이 절대 없는 여자였으니까. 그러니 아내의 길도 나의 길도 이제 완벽하게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버린 셈이었다. 그걸 되돌릴 수도, 번복하려고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 생존의 문제는 아내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됐으니까.


  내 눈앞에는 100만 원이 든 흰 봉투가 있었다. 봉투 속에는 5만 원짜리 20장이 들어있었다. 식탁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 이글이글 타오로는 정오의 태양처럼 광선을 투시했다. 봉투를 열고 20장의 지폐를 꺼냈다. 한 장 한 장 숨도 쉬지 않게 헤아려봤다. 역시 빈틈없이 완전무결한 스무 장이었다. 실수란 게 고개를 들이밀 공간이란 게 그 안에는 없었다.


  처갓집에 연락해야 할지 고민이 앞섰다. 장모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고민할 사람만 하나 더 늘어날 뿐이었다. 나 혼자 떠맡는 게 좋겠다 싶었다. 어쩌면 아내가 이미 연락했을지도. 뭐 지금은 처갓집을 생각할 여유도, 가출한 아내가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모두 필요 없었다. 단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문제가 더 현실적이니까.


  오늘도 더위는 피크를 찍었다. 온도계를 보니 실내 온도가 32도를 넘어섰다. 에어컨이 천정에 멀쩡하게 있었지만 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관리비를 어떻게 감당할지가 현실이 되었기에. 어쩌면 P 선배에게 당분간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무엇이든 아껴야 했다. 가능하다면 먹는 양도 줄여야 했다.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는 더욱더. 이런저런 궁리에 빠져있다, 차라리 뜨거운 여름 뙤약볕 아래로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카키색 야구 모자, KF94 마스크, 선글라스를 눌러쓰고 현관문을 열었다. 눈앞에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계단 안쪽에는 사우나 같은 공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계단 하나씩 아래로 아래로 바닥을 세게 밟아가며 내려갔다. 총 스무 개의 계단이었다. 왜 스무 개였을까. 5만 원 권 스무 장, 계단 20개, 20이라는 숫자가 기분 나쁜 느낌을 전달했다. 1층까지 내려가서 다시 공동 현관문 쪽으로 이동했다. 서늘했다. 계단과는 다른 공기가 그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바깥과 안쪽의 기류가 뒤섞여버렸다.


  산책로를 따라 무겁게 걸었다. 유모차에는 갓 돌 지났을법한 아기가 누워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조용히 유모차를 미는 엄마의 평화로운 그림자가 보였다. 재활용 장에서는 버리는 것인지 주워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물건을 분리수거 중인 할머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학원에서 막 도착한 노란색 스쿨버스도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낮에 속하는 남자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런 평일 대낮에 아파트 주위를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생소했고 낯설었고 처음 보는 장면이었으며 나는 그곳을 경험하는 최초의 인간이기도 했다.


  아파트 한 바퀴를 크게 돌아서 제 자리쯤으로 돌아왔을 때 선배에게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일 자리 하나 구했거든? 이따가 한가할 때 연락 좀 해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이지 않던 돌파구가 슬슬 나타나는 낌새라도 보여준 것 같았다. 그늘 밑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 관목 옆으로 소나무가 크게 몇 그루 서 있었다. 그쪽으로 돌아가니 작은 벤치가 나타났다. 거기에 앉아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일자리 찾았다고?”

  “그래. 인마 내가 일자리 찾는다고 여기저기 얼마나 수소문했는지 알아? 아무튼 그걸 네가 알아봐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중요한 건 자리 하나를 찾았다는 거니까. 내일 오전 8시까지 여의도 모 회관으로 가봐.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돼. 그쪽에서는 마침 일하던 사람이 그만둔 바람에 대체할 사람을 찾고 있다니까. 늦지 않도록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네 오전 2시간 일하고 오후에는 퇴근해도 되는 건 가봐. 그렇게 일하고 최저 시급보다 더 챙겨준다니까. 게다가 짭짤하게 부수익이 생기는 일도 더러 생긴다니 기대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아무튼 난 자세한 내용은 모르니까. 내일 도착해서 이야기 들어보고 결정하라고. 뭐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으니까. 내 눈치는 보지 않아도 돼”

  “선배 고마워”

  “야,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다 들어보네. 아무튼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 들려달라고. 제수씨 가출한 이야기 말이야. 나 바쁘다. 나중에 통화하자.”

  “어, 그래.”


  통화를 끝내고 나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고 에어컨을 켜려다 말았다. 찬물로 아주 오랫동안 샤워를 했고 얼음을 가득 담은 커피를 마시다 말았다. 그렇게 오후는 혼자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런 기대감은 오래전에 상실하고 말았기에 그저 무덤덤하게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이 그 순간 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오전에 서둘러야 하니 그날은 일찍 잠들기로 했다. 9시가 되기 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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