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나를 소진시켜 이를테면 수없이 많은 원과 원 사이를 유영하다 어느새 한 가지 마음에 드는 원을 만나고 그 속으로 회전하듯 중심부 속으로 밀려드는 거야 글이란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원리를 따지지 않아 믿음의 규명을 거부하고 본질이라고 믿은 거짓 따위에게 파고 들어가 물론 약기운은 없었어 약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맨 정신이라고 얘기하고 싶진 않아
가운데 구원의 빛이 열려 있지도 않아 그냥 이끌려 원인도 결과도 없이 한 번 빠지면 내 짧은 생에서 그림자가 하나씩 잘려 나가는 거지 발가락 끝에서 정수리까지 하나씩 갉아먹는 거지 그런 거야 글이란 그런데도 쓸 거야?
그런 원이 매일 바뀌지 오늘은 타깃이 새로 입혀지는 거지 어제 건 그만 흔들려버렸잖아 그래 오늘은 바로 이거야 나는 네가 원이 되었으면 좋겠어 인생의 목적이냐고 한 때 실컷 드나든 종착역쯤은 됐겠지 12시 무렵의 지하철역 말이야 깜빡 잠들었다가 정수리 부근이 서늘해지면 어느새 찾아오는 절망의 회오리 그런 거 말이야 우습게도 그럴 땐 소설이 쓰고 싶지 않아? 죽도록 나를 두드려 패고 또 내팽개치고 망가지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거야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뛰어드는 거지 나 하나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그런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와 내가 지금 일하는 환경에서 말이야 오늘은 몇 백자의 코드를 만들어냈나 관찰을 해봐 오늘은 성적이 신통찮아 겨우 100자에도 근접하지 못했어 이 망할 개발자, 그런 직분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고 밥값도 못했네 썩을 글이나 써 대신 너를 갉아먹을 테니까 벌레처럼 네몸에 몰래몰래 싹을 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