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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04. 2021

내가 정말로 잘하고 싶은 일, 그 일을 해내는 방법

신나는 글쓰기 미션

정말로 잘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잘하고 싶은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늘 궁리만 하거나 계획만 하는 일은 없나요?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 여러분은 현재 어떤 길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노력을 치열하게 펼치고 계십니까?

어떤 일이든 결국 잘 해내는 비결은 그릿(Grit)이라고 합니다. 그릿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 길로 꾸준하고 전진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도전 정신, 불굴의 의지, 용기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그릿은 무엇인가요? 무엇을 정말로 성취하고 싶은지 여러분의 내면이 전달하는 그 소리를 잘 듣고 계시나요? 혹시 무력증에 빠지거나 결과를 거두지 못해서 실망하거나 스스로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나요? 성공의 열쇠는 절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빛을 내겠죠. 고흐가 말한 것처럼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대쪽에 서 있는 성공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겁니다.

세상엔 불행이 있어서 행복이 의미를 갖고 절망이 있어서 희망이 존재하고 악이 있어서 선이 그것을 누르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는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한쪽에 치우치는 편입니다. 그쪽에 빠지면 반대편의 세상을 보지 못하죠.

잘 해낸다는 것, 그것은 고흐가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철벽을 맨손으로 줄기차게 때리는 건 아닙니다. 철벽을 어떤 도구로 어떤 전략으로 맞설 것이냐 그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겁니다. 단순하고도 무식하게 접근하는 건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죠. 물론 인내심이 중요하긴 합니다. 철벽은 말 그대로 철로 이뤄졌으니까 웬만한 힘으로는 돌파하기 어렵겠죠. 어떻게 통과할지 수많은 노력과 검증 절차와 아이디어가 동원되어야 겨우 가능해질 겁니다. 결국 노력이라는 것은 요령이 수반되는 노력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잘 해내고 싶은 것. 그 위대한 일을 위해 어떤 노력과 실용적인 과정을 실천 중인지 추상적인 접근 말고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써보시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어떻게 투자할 것인지 생각해 보고 그 구체적인 실현 방법(아이디어)을 모두 써봅시다. 여러분의 글이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용적인 자세로 써봅시다.

- 공심


  잘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소설을 써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소설은 잘하고 싶은 그 무엇이려나. 하여튼 무언가를 잘해야 하는 조건이 붙는다 해도, 그것이 소설인 경우는 나를 제외하곤 거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직업적으로 바리스타는 아니어도 파우더와 거품 따위를 그럴싸하게 조절하여 라테아트를 예술적 경지 수준으로 표현하는 문제라든지, 손가락 5개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 라흐마니노프 정도의 손바닥이라면 가능할지도 -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와 같은 연주를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끝마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소설을 쓴다는 문제, 짧거나 혹은 긴 문제는 논외로 치고 어쨌든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얼마나 길게 쓸 것인가, 즉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서 어떤 타당한 결말을 맞도록 인물이든 사건이든 개연성을 유지하고 일관성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인가, 짧던 길든 간에.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가 그동안 읽었거나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와는 중복되는 점이 없어야 하는가. 내 삶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어딘가 안전한 가옥에 몰래 숨어서 속마음을 표출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직업적으로 소설가의 지위도 앞으로 그런 지위로 격상하게 될 확률도 그다지 높지 않을 테니, 이런 걱정거리에 휩싸여 지금 당장 소설 쓰는 일을 그만둘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거나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계속 쓰자고 결정할 것인지도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처럼 속의 것을 시원하게 토해내면 그만일 것이리라. 여전히 어떤 제약사항은 시작할 동기부여든 지속할 힘이든, 나도 모르게 생겨난 에너지를 어느 순간 위축시키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 소설에서 ‘섹스’와 ‘사람이 죽는 장면’을 담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은 하루키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 친구, ‘쥐’가 쓰는 소설의 명확한 한계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루키는 스스로 그것을 넘어섰다. 소설은 무언가를 넘나드는 것인데, ‘섹스’와 ‘사람이 죽는 장면’을 생략하고는 절대 진전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나는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깊이 고찰할 필요성이 있으며 내 소설에서 두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는 숙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작가의 말’에서 이런 말도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대해 긍정하며 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다만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래 하루키는 썼고 그들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쓰고 있다. 멈추지 않고 쓰는 게 중요하다지만 무엇을 써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며 그저 들려오는 이야기를 받아쓰기만 한다. 그래, 소설은 받아쓰기다. 귀를 활짝 열어젖히고 안쪽에서 팽창하는 세계를 받아쓰는 게 소설이다. 이해하려고 분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쓰면 무엇을 더 알게 될지, 어떤 미지의 영역, 건드리면 안 되는 금단의 열매를 맛보게 될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현재의 어떤 악조건이든 어떤 희망적인 미래의 위치든, 그런 건 따지지도 가정하지도 않고 쓰면 그만이다. 쓰면 어떤 사건이 벌어지려나, 그런 기대를 안고 소설을 쓰게 되면 소설의 맛에서 멀어질 것이리라. 필연적으로 실망과 좌절을 안아야 할 것이며 고통에 신음하며 하루하루 분량을 애써 채워나가게 될 것이리라.


  우리는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이렇다 저렇다 나름의 품평회 시간을 갖는다. 취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소설을 읽으면 필연적으로 작가에 대해, 이야기에 대해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하루키의 주변인들이 평가한 것처럼 그 정도는 쓸 수 있으려나 라고 가정해봤다.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진한 무력감이 찾아왔다. 세계적인 거장에 합류한 하루키의 현재 위상을 고려할 때, 비록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그의 첫 소설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소설은 하루키의 세계에 편입된 그의 일부였으니까, 나로서는 그리 간단하게 평가를 내릴만한 처지도 아니었으며 나도 가능하다며 단정할 근거도 극히 희박했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을 쓴다. 소설이 아니면 다른 어떤 글도 이미 나에게는 시시한 것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 하지만 제도권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가능성 - 등단 - 없는 노력에 뛰어들곤 싶지 않다. 그것은 나에게 무력감을 선물할 것이 99%에 근접할 것이기에. 


  나는 이미 하루키가 첫 소설을 쓴 29세에서 너무 훌쩍 지나쳐버렸고 - 20대 후반에 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머리도 심각하게 굳어버렸고 현재 너무나 안정적인 직장에서 빌드 넘버 2740이라고 찍힌 컴파일러와 20년째 씨름 중이 아닌가. 또한 돈과 상관없이, 명확한 목표의식이 없어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인생의 모토를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지나쳐버린 시절, 그 시절에만 꿈꿀 수 있는 요소에 대해 잠시 취해보는 것으로 후회 혹은 막역한 감정을 애써 눌러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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