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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07. 2021

아내가 가출했다 5

아내가 가출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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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가출했다 3

아내가 가출했다 4



 나는 어딘가에 정신이 홀린 듯이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그것을 남자에게 제출했다. 오늘부터 당장 업무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계약 조항에 따른다면 나는 어딘가에 물건을 배달하러 2시간 후에 사무실에서 나서야 한다. 배달하는 물건은 고객이 요구하는 조건이 담긴 일종의 데이터 꾸러미다. 다만 데이터는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이 아니라 반드시 종이에 출력되어야 한다. 그 방법이 비록 구시대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고객의 특별한 요구사항이니 대안이 있어도 소용없다.


  그 데이터 뭉치엔 고객이 원하는 고유의 형식들이 담겨 있다. 내용이든 어떤 형식적인 것이든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관심도 딱히 없다. 오직 고객이 원하는 형식이 중요할 뿐이니 나는 그것을 잠시 따르거나 신경 쓰는 척하면 된다. 고객이 주문한 물건은 복사기 트레이에 일정한 속도로 출력되곤 무작위적으로 쌓인다. 누군가 그것을 분류하고 봉투에 담고 나서 라벨링이 끝나면 나와 같은 딜리버는 전달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반드시 두 손으로, 고객에게 직접 대면으로 건네야 한다. 그것이 이곳의 룰이다.


  끝방 한쪽 벽, 그러니까 복사기 두대가 열심히 작업 중인 바로 오른편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문은 문으로서의 소임을 제대로 맡고 있다고 봐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문은 어디론가 통하는 관문이 되고 바깥쪽과 안쪽의 경계를 가른다. 하지만 내가 면접을 본 끝방과 저 문 안쪽의 세계는 외관적으로는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크기면에서 다르다고 추측할 뿐, 어떤 성격으로 문 바깥과 안쪽의 세계를 구분 지을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나는 문 안쪽 그러니까 독립된 또 하나의 공간 속으로 편입됐다. 그곳으로 들어간 것은 두 시간 동안 소설 한 편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 역시 까다로운 계약조건 중 하나다. 물론 그 소설은 등단을 위해 내가 도전했던 신춘문예와는 성격이 다르다. 나는 그저 쓰레기일지라도 2,000자 가까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고객이 어떤 소설을 원하는지 어떤 성향의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나는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솔직히 고객의 취향에 관심도 없다. 그러니 나는 의무적이긴 하지만 내 본능에 충실하게 고객이 앉을자리 하나만 만들어놓으면 된다. 고객이 원하는 이야기는 차차 만들어나가면 그만일 것이다.


  비밀리에 공작을 펼쳐야 하는 문 안 쪽의 세계에는 가로 세로 1미터 정도의 채리 색상의 책상과 역시 채리 빛깔이지만 단순하게 그 색깔로 채색됐을 뿐인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방 가운데 십자 중심선을 기준으로 정확히 반을 가르는 지점에 반듯하게 놓인 책상, 누군지 모르지만 독특한 취향이 아닌가. 그리고 책상 왼쪽 끝과 오른쪽 끝에는 조명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조명이었다. 내 얼굴을 비추는 것인지, 글을 써야 할 노트북을 비추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조명, 왜 스탠드가 아니라 촬영용 조명인지 이해할 수 없는, 혹시 누군가 나를 실시간으로 감시라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2,000자 규모의 소설을 써야 한다, 라는 지령에 따라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은 단 2시간이었다. 그런데 1시간쯤을 넘겼으려나, 그럭저럭 읽을만한 소설 한 편이 완성됐다. 남녀가 우연히 독서모임에서 만나 눈이 맞은 다음,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러다 서로의 가정을 버리게 되고 결국 그 이유 때문에 파멸을 맞게 된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가진 삼류 소설이었다. 왜 그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순간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일 뿐이었다. 1시간 초고를 쓰고 약 20분 탈고를 마친 다음 문을 열고 다시 방 바깥으로 나간 다음, 복사기에서 소설을 출력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이미 내가 배달해야 될 물건이 흰색 봉투에 작업되어 있었다. 나는 출력된 소설을 봉투에 같이 넣곤 봉인 작업을 마무리했다.


  아까 면접을 본 남자는 사라진 상태였다. 복도를 따라 들어왔던 문 입구 위에는 CCTV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뭐 들여다본다고 딱히 눈치 볼 이유는 없다. 나는 계약대로 행동만 하면 된다. 봉인된 봉투를 집어 들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3호선 경복궁역 주변, 누하동 XXX번지. 오후 3시까지 배달 완료할 것"


  봉투 밑에는 법인카드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포스트잇에는 법인카드를 어떤 용도로 쓰면 되는지 제한 사항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식대와 음료 외 절대 이용 불가" 흐음, 커피는 무한대로 결제해도 된다는 건가. 나는 카페에 앉아서 아메리카노를 10번 리필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방광이 팽창이라도 하는 듯 갑자기 화장실에 들르고 싶어 졌다.


  건물 바깥으로 나온 시간은 11:30분쯤이었다. 마침 건물 옆에 맥도널드가 있었다. 상하이 스파이시 치킨 버커 세트와 감자 라지 사이즈, 음료는 콜라 대신에 아메리카노로 주문했다. 맥도널드에는 오직 나뿐이었다. 창밖이 보이는 쪽에 앉아서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햄버거를 입속으로 대충 욱여넣었다. 가출한 아내는 햄버거를 비교적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어쩌면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왜 나와 데이트할 때마다 맥도널드와 이 싸구려 햄버거에 집착했었을까. 지금은 물론 그런 정보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아내는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는가. 나는 주린 배를 대충 채우고 3시까지 고객에게 물건을 배달하면 된다. 여의도역에서 경복궁 역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5분 만에 햄버거 하나와 프렌치프라이 라지 사이즈를 해치우곤 바로 여의도역으로 출발했다. 딱히 이곳에선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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