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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08. 2021

아내가 가출했다 6

여의도역, 에스컬레이터, 전화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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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가출했다 5



  

  5호선 여의도역에 도착하여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섰다. 아래쪽으로 물결이 치듯 마치 하수도 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살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존재가 잠자코 흡수되는 것 같았다.


  11시 40분을 넘긴 시각, 꽤 오랫동안 아래쪽으로 내려갔으나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단 1분이라도 내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정지해버리는 거라면.


  개찰구를 통과하고 또 다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플랫폼 쪽으로 내려갔다. 인간을 위험한 요소로부터 안전하게 분리시키려 만든 장치였지만, 과연 선로 그 자체가 공간적으로 위험할지 아니면 인간이 더 위험할지 이질적인 생각이 플랫폼 끝에서 차분한 공기 분자들을 교란시켰다. 스크린 도어,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불안정한 세상, 세상은 보이지 않는 문으로 서로의 구획을 나누고 있었다. 절대적인 완벽함이란 이 세계에 과연 존재할까, 나는 한치의 빈틈도 없는 말하자면 스크린 도어가 창조한 열차란 세계 그리고 내가 창조한 완벽한 나라는 세계,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로 만들어진 아래쪽과 위쪽을 오고 가는 지극히 나약한 인간일 뿐,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공상도 잠시일 뿐이었다. 상일동행 지하철이 곧바로 도착했고 스크린 도어가 열림과 동시에 숨 쉴 틈도 없이 바로 안쪽으로 떠밀려 들어가야 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 분명 밀친 것 같았지만 돌아보면 역시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지만 바쁜 들숨과 날숨이 공존했다. 모두들 제철을 맞아 휴가라도 떠난 것이었을까. 나에게도 이곳 지하철 내부의 한산함처럼 빈틈이 얼마간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짧은 휴가란 것을 다녀왔고 지금은 홀로 서야 하는 존재가 됐다. 아내는 이해 못할 이유로 상의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고 생존의 문제가 현실이 된 것이다. 나는 아마도 평생 아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줄기차게 서로의 평행선을 유지해왔을 뿐이다. 지금은 그마저도 사라졌지만.


  생각보다는 행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제시간에 고객에게 원하는 물건을 배달하고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고 그것으로 하루를 버텨나가면 그만이었다. 철저한 미래의 대비란 것도 의미가 없었다. 예전처럼 규칙적인 직장인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는 어디에서든 환영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는 이렇게 12시 무렵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인간으로 살아야 하리라.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왠지 아내와 관련된 용건일 것이라는 가정 때문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실, 시끄러운 벨소리도 한몫을 차지했지만...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나는 정차할 역의 이름이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나가고 보니 공덕역이었고 전화 벨소리는 플랫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정수현 선생님 되십니까?"


  모르는 목소리, 알 수 없는 번호, 예측할 수 없는 거리, 불길한 생각이 급습했다. 나는 도주할 퇴로를 찾지 못한 역사의 패잔병일 뿐이었다. 그런 하찮은 병사일 뿐인 나를 왜 자꾸 사람들은 선생님이라 칭하는 걸까. 이해하지 못하겠다.


  "네. 제가 정수현은 맞습니다만..."

  "아, 맞군요. 여기는 '부자 되세요' 부동산이에요. 선생님께 용건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부자 되세요' 부동산? 대낮 12시 무렵에 부동산이 나를 급하게 찾는다? 나는 부동산에 아무런 의뢰를 한 적이 없다. 아내의 명의로 된 집을 내놓은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집주인으로서 아내가 부동산에 용무가 있기는 하겠지만, 며칠 전에 내가 조사한 바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부동산이 정오 무렵에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점심시간에, 모두가 찰나의 여유를 찾는 시간에 말이다.


  "차지현 씨가 아내분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아내 이름이 차지현이었던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아내를 당신, 자기 혹은 그 밖의 기억나지 않는 호칭으로 불렀다. 새삼 아내의 이름이 차지현이었다는 사실, 그 이름이 왜 나에게 이토록 낯설었을까. 아내와 내가 분리되어서 그러니까 서로 독립된 처지가 됐다는 사실을 깊이 환기라도 시켜줬기 때문이었을까. 아내의 이름, 차지현,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이름을 가진 차지현, 그래, 아내의 이름은 어느 날부터 차지현이었고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내 분이 오늘 오전에 저희 부동산에 다녀가셨어요. 집을 빨리 매매해달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매매에 필요한 서류들 그러니까 위임장을 작성하셔서 전달하고 떠나셨죠. 하루빨리 급매로 매매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과 함께요. 그런데 선생님도 잘 아시다시피 요즘 매매가 잘 안되잖아요. 정부의 규제도 있고 대출도 예전 같지 않아서 우리 입장에서는 손님이 생기면 빨리 처리하는 게 그나마 현명한 일이거든요. 마침 손님이 한 분 오신 거예요. 아마도 그분이 찾는 집과 선생님이 사는, 아 사모님의 집이라고 봐야겠네요. 호호호 아무튼 그 집을 마음에 들어 하는 임자가 나타났어요. 그래서 집을 좀 보려 드릴까 하는데, 선생님 혹시 지금 댁에 계시나요?"


  음, 사건의 발생 원인은 차치하고 현재 벌어진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해야 했다. '부자 되세요' 부동산 사장의 말로는 오전에 아내가 집을 내놨다고 했단다. 얼마에 내놨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지만, 집이 팔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내 현실 쪽에 해당된다. 즉 나는 집에서 곧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런데 누군가 당장 이 집을 살 것처럼 구경하고 싶단다. 그러니 아마도 부동산 사장은 지금 당장 집을 보여달라는 결론일 것이다. 게다가 사라진 아내가 오전에 부동산에 나타났다. 나와 마주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서.


  하지만 나는 아내의 결정이든 부동산 사장의 요청이든 협조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 나는 오늘 점심을 하찮은 햄버거 덩어리 하나로 때웠고 지금은 고객에게 중요한 물건을 배달 중이며, 아직까지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며 나는 집을 팔 생각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결정이란 것은 오직 나에게만 통용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집의 주인은 아내였기 때문에, 부동산에 물건으로 내놓은 결정도 누군가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도 결코 허락받을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한때 부부지간, 아니 법적으로는 현재 적어도 부부라는 사실이어도 아내의 결정엔 내가 개입할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 제가 아내분으로부터 말씀은 들었어요.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지금 문을 열어주시지 않아도 저는 이미 도어록 번호도 알고 있고 아내분으로부터 키도 인계받았어요. 저는 법적으로 그분의 대리인이라, 선생님이 문을 막아서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설사 오늘 문을 안 열어주셔도 저나 손님은 내일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렇게 막아서는 선생님의 행동이 앞으로 닥칠 미래를 결코 방해하지 못할 거라는 건 명확해요. 그러니 혹시나 일부러 협조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월권이었다. 지나친 권력의 남용. 부동산 사장은 어딘가 내 삶의 경계 안쪽까지 침범한 것이다. 아내의 모든 법적인 권리를 인수받았다는 부동산 사장의 말은 횡포였고 아니 나아가 선전포고인 셈이었으나, 그 말엔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이 도사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객에게 배달할 중요한 물건, 그 물건엔 내가 20년 만에 쓴 소설도 동봉되어 있었고 어쩌면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가설도 동봉되어 있었으니, 그 집의 매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찾아왔다.


  "그래요. 열쇠를 가지고 계시면 문은 얼마든지 딸 수 있겠네요. 지금 처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셈이네요." 나는 무력감이 가득했지만 최대한 그것을 객관적으로 표현해내려고 애썼다. 마치 소설을 쓰듯이.


  "제가 지금 외출 중이라 어차피 집에 도착해도 손님은 떠나갈 테니. 그냥 지금 가셔서 집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아참, 제 아내에게 받았다는 위임장, 그러니까 법적인 서류들을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자 메시지로 좀 보내주세요. 최소한의 절차적인 검증이지만요."

  "네 선생님 그렇게 할게요. 협조해주셔서 감사해요. 손님분께는 지금 바로 집을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5분쯤 지났을까, '부자 되세요' 부동산에서 전송한 위임장이 도착했다. 그 서류에 서명된 것과 필체는 아내의 것이 분명했다.


  -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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