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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09. 2021

아내가 가출했다 7

누하동, 시식, 딜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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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은 아마도 오늘 바로 매매가 성사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가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언제까지 집을 비워줄지는 전적으로 내 의지에 달려있다. 버티면 그만일 것이다. '버티기 작전에 들어가자, 그래 갈 때까지 한 번 가보자. 설마 사람이 사는 집인데, 내가 집을 무단으로 점거했다고 한들 경찰을 부르기라도 할 것인가 강제로 짐을 내다 버리기라도 할 것인가.' 그런 일은 과거 군사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간 밤에 사람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하지만 시대가 진보하고 인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해서 그런 몹쓸 짓이 영영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언제든 그 집을 비워줘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


  '부자 되세요' 부동산과 통화를 끝내고, 다시 지하철에 올랐다. 집이 사라진다고 해도 고객과의 약속까지 유통기한을 넘겨버리는 건 곤란하다. 그러니 나는 ‘딜리버’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하지만 피곤했다. 그 진한 피곤함을 누를 길이 없어서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등 뒤에서 먼지가 풀썩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하철 내부는 아까보다 밀도가 높았다. 사람들은 유달리 불친절했고 무뚝뚝했다. 코밑으로 마스크를 내려쓴 노인이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정권을 욕하며 씩씩거리고 있었고 덩치 큰 남자는 찢어진 청색 반바지를 입고서 일부러 내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물론 여기저기에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 남자는 나에게 시비라도 걸고 싶었나 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분노에 지배라도 당한 듯싶었다.


  광화문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대략 12시 30분이었다. 3시까지 배달을 마치면 된다고 담당자는 나에게 강조했다. 광화문역에서 목적지인 누하동까지는 걸어서 대략 30분이면 충분했다. 딜리버는 제시간에 배달하는 게 역할이자 최소한의 원칙이다. 현장에 다소 일찍 도착하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2시간 일찍은 아니다. 그건 고객에게도 딜리버에게도 비매너 짓이다. 그러니 나는 중간 어디쯤에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길거리에서든 혹은 대형 서점에서든 뭔가에 잠시 열중하며 시간을 흘려보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뭔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것의 구체성에 대해 그다지 찾고 싶지도 않았다.


  대체 나는 무엇을 하며 2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 2시간은 꽤 광범위한 메타포를 지니고 있었다. 무의미함과 유의미함,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활동, 열정과 무력감이라는 메타포를 끊임없이 생산했고 내 머릿속에 끊임없이 의식을 주사했다. 나는 그런 생각에 잠식당할수록 더 깊은 의미에게 포위당하다가도 다시 무의미에게 제압당하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여유라는 것은 내 삶을 더 소모적인 것들로 퇴화시켰다. 나는 성장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더 거꾸로 되돌리려고 애쓰기만 했다.


  세종문화회원 별관을 지나쳐 경복궁 역을 거쳐 다시 자하문로를 따라 누하동으로 진입하는 코스가 나에게 최종적으로 배당됐다. 나는 정해진 길을 따라 초행길을 마치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처럼 걸으면 된다.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지만 아주 가끔 활발한 기운으로 들뜨기도 했다. 밝은 발걸음의 직장인들이 아메리카노를 들고 양옆으로 지나치자, 나도 그들이 만든 삶의 영향권으로 진입이라도 한 것처럼 기분 좋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 현실은 등줄기에서 흐르는 식은땀처럼 존재를 서서히 드러냈지만... 나는 실직했고 기약 없는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정신없이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서촌 게스트하우스를 지나쳐 크로켓 가게가 보이는 작은 사거리를 넘어서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선 효자 베이커리를 돌아서 그러니까 마치 이 동네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기라도 할 듯이 돌아다녔다. 상점 간판에 찍힌 메뉴판의 가격표를 달달 외우고 독립서점에서 취급하는 도서의 긴 제목을 외웠으며 마지막 종착지 베이커리에서는 시식으로 제공되는 빵 몇 조각을 뜯으며 무표정한 얼굴을 주인에게 보냈다. 아마도 나는 세 바퀴쯤을 돌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열 바퀴 이상을 돌았을지도 모른다. 도는 것 자체에 의미를 뒀을 뿐 몇 바퀴를 돌았을지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나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무료로 시식했다. 마지막엔 꽤 배가 불렀으므로 배회하는 일을 멈춰져야 했다.


  돌다 보니 2시 40분 무렵이었다. 고객에게 전달할 물건을 확인한 후 약도에 찍힌 고객의 집을 향했다. 작은 골목이 목적지 찾는 것을 더디게 만들었다. 몇 번을 비슷한 골목을 지나쳤는지 모른다. 왔던 곳을 또 지나가고 방금 전에 지나친 곳을 다시 통과하는 수고스러움을 반복하다 겨우 고객의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그렇지만 그 안쪽의 세계에선 아무런 반응도 동태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는 시간을 가져볼라는 찰나에 고요를 물리치고 문이 덜컥 열렸다. 아무런 정보도 예고도 없이 별안간 내부가 환하게 개방된 것이다. 나는 발 한쪽을 안쪽에 슬며시 내밀었다. 바닥은 가라앉기라도 하는 것처럼 축축하면서도 단단했다. 어릴 적 공포스러웠던 귀신의 집, 그 캄캄하기만 한 공간에 첫발을 내딛는 것 같았다. 물론 내부는 그때와는 다르게 환했다. 귀신의 집처럼 공포스러운 분위기도 그곳엔 없었다. 작은 정원엔 철쭉, 제라늄, 그리고 이름 모를 선인장이 장식된 화분들이 보폭이 좁은 길을 따라 가지런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마치 불시착하는 비행기를 위한 밤의 특급 조명 같았달까. 아무튼 나는 깊게 안도하며 안쪽으로 이동했다.


  좁은 길을 따라 현관 쪽으로 향했다. 작은 정원을 지나쳤으나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잘 나가는 연예인이 이런 작은 집에서 산다고?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외관을 투시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이 집은 20평이 채 되지 않을 기세였다. 음, 이 집에 사는 연예인은 꽤 겸손하면서도 소박한 성격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일은 잘 마무리될 것 같았다. 현관 앞에 서자, 열린 문틈 사이로 안쪽의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회색 빛이었다. 검은색과 구별하기 힘든.


  -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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