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과 행복 사이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상처는 반드시 곪는다.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해 두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받고 사는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처에 내성이라도 생긴 것이라고 착각이라도 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지속적인 상처, 더군다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일방적인 상처를 받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게다가 상처를 받는 대상이 어린아이라면. 또한 병 주고 약 주는 상황이 무한대로 반복된다면 그 아이는 상처에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편이다. 나 또한 그 공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상처의 가해자는 아버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가까운 아버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왕처럼 절벽에서 아버지를 밀어버리는 상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한때는 아버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환한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빈 적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두고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로 평가를 할 것이다. 얼마나 후레자식이면 아버지가 사라지길 비냐고 하는 사람,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고 동정하는 사람, 아마도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질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였던 나는 상처에 늘 무방비 상태에 노출된 편이었다. 그 상처는 다만 신체적인 위해 같은 간 아니었다. 지극히 정신적인 형태의 것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공포가 물리적인 폭행보다 더 거셌다. 그것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범주의 통증이었다. 오직 두려움만 가중시키는.


이렇게 글로 어떤 가정의 민낯을 표현하는 것이 어떤 유용한 결론을 맺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더 늦기 전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속에 오랫동안 앙금처럼 남아 있었던 내 이야기를 들춰내고 싶었다. 들춰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제야말로 그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 봐야겠다는 다짐, 상처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어떤 적극적인 자세, 상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결정이 그곳에 포함됐다는 얘기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 따르면 모든 가정은 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단다.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 나 역시 불행할까? 나 스스로 질문을 설정해놓고 대답을 요구한다. 내면과 내면이 충돌한다. 주저하는 쪽과 맞서는 쪽이 충돌한다.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 어렵다. 불행하다면 불행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는 여하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대답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대답은 유보된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내 가정도 가끔 불행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내 유년 시절의 전부가 지독히 불행한 세계에 뒤덮여 있었다는 건 아니다. 대개의 기운이 보통 그런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편이다. 내 기억 공간 어딘가는 부정적 기운이라는 뱀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정서적인 학대를 받고 살았다면, 내가 그 이유 때문에 삐뚤어질 충분한 이유는 만들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물론 한때는 삶의 모든 것들을 놓아버린 시절이 있긴 했다. 인생이란 건 아무렇게나 흘러가라고 시간에 나를 묻어버린 것이다.


모든 건 내 선택에 달려있다. 그런 상처의 굴레에서 계속 갇혀 살 것인가, 그 철조망을 스스로 뚫고 나오며 고통을 무릅쓸 것인가. 선택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결정을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라. 결정은 내가 내리고 내가 끌어가는 것이며 전적으로 내가 책임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쉽지 않다. 그런 건 성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잠시의 산물일 뿐이다. 나는 다시 유년 시절의 악몽 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만다. 그리고 고통에 휩싸인 채로 살아간다. 나머지 인생, 수십 년의 인생을 계속 상처의 갇힌 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치료해야 하는, 그 작업을 멈추면 상처는 다시 내 온몸을 뒤덮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려한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이제 건너보려고 한다. 다리 저 편에는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가 서 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사실 없는 것 같다. 사실 건너편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다. 이쪽과 저쪽에 서 있는 건 바로 나다. 다리 사이에서 나는 지금 방황 중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내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지금 반대편으로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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