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아들의 아버지는 될 수 없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만약 일방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생겼을까?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사랑이야말로 일방통행 같은 게 아닐까. 나는 아버지가 놓은 그 길을 따라 같이 걷고 싶다. 하지만 길을 잃었다.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늦어버렸다. 아버지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고난의 길이 열린다. 그 길은 낙타의 굽은 등처럼 위로 아래로 또 좌우로 휘었다. 깊고 깊은 굴곡이 나타나면 나는 그 밑으로 추락했다, 겨우 추스른다.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반복될 아비 없는 자식이 감당해야 할 무서운 운명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나는 이런 울퉁불퉁한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낭떠러지가 되기도 하고 올라갈 수 없는 언덕의 형상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걸어도 걸어도 나는 어디든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언덕 밑에 앉아서 나는 아버지의 부재, 그리하여 내 삶에 갑자기 나타난 형제 없는 결핍 때문에 몸살을 앓고 만다.


내 존재의 원천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현실에서 부재의 의미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아버지의 죽음은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것도 니체의 사막 낙타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물질적인 것이 합쳐진 엄연한 현실 안의 세계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매일 아침마다 인정하지 못한다. 사진 속에서 과거에 우연히 촬영된 비디오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든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사랑은 무한하다. 생명이 이어지는 한 그런 편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사랑은 유한한 것이다. 나는 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한 아들의 아버지는 될 수 없는 탓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가 속으로 끙끙 앓았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만의 사랑의 방식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역시 딩크를 선택한 것은 패착이었을까.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려면 나 역시 아버지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끈을 내 손으로 끊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몹쓸 유전자를 또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아들이었을까? 과연 특별했을까. 특별한 만큼 아버지에게 충분한 사랑을 공급받고 자랐을까? 그런데 지금의 내 결핍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아버지에게 사랑을 하나도 받지 않은 것 같을까. 왜 그럴까. 모자란 기억력 탓일까. 나쁜 것만 추억하려는 내 기질 탓일까.


나처럼 유년 시절에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름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고 믿는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부모와 애틋한 정서를 교환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적어도 이번 글을 쓰기 전까지는.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은 하밀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나는 이 질문을 내 마음대로 재해석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나는 머뭇거린다. 글쎄, 살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그것은 내가 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불변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어서 산이 되든 바다가 되든, 태양이 되든 달이 되든,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든, 그 무엇이 되든 나는 그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거 자체가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거부할 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거다. 나는 내 아버지의 아들이며 나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아버지가 만든 길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 길을 만약 혐오한다면 그 얘기는 곧 나를 부인한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물론 그 말이 내 미래를 완전히 한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커다란 흐름은 정해져 있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개척할 수 있는 길이 꼭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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