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의 정체, 원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죽음이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안다. 그것은 죽음을 맞으면 세상과 영원히 단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절이란 모든 관계와의 영속적인 끝남을 뜻한다. 관계의 완벽한 정리, 영원한 이별, 비극적인 결말, 결국 죽으면 내가 존재하던 세상이 종말을 맞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타인의 죽음을 나에게로 대입시킨다. 마치 어린 시절의 내가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 마지막 장면에서 마르코 폴로와 파트라슈가 교회당에서 얼어 죽는 장면을 보면서 그 슬픔이 내 것이 되는 경험처럼 죽음은 객관적인 세계에서 주관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에겐 아버지의 죽음이 그랬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끝은 내가 인생에서 겪어보는 최초의 상실감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그런 것이 되지 못했다. 주관적인 슬픔이어야 할 그 무엇이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처럼 객관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브라운관 안에 속함으로써 나와는 그리 상관이 없는 것으로 취급된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왜 그렇게 대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이유는 찾기 힘들다. 그저 이상한 의문감만 남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왜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주관적인 슬픔이 되지 못한 걸까. 인간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든 반드시 해답을 찾고 싶어 한다. 비록 그 사실이 진실을 덮은 위장막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 역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 앞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결론을 찾아야 했다.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아버지와 나 사이의 단절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끝이라는 어떤 시간의 마침표, 존재가 소멸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구축한 세계에는 여전히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존재를 나는 애써 부인했지만, 아버지는 내 생각 속에서 또한 꿈속에서도 언제든 현현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용서한 기억이 없다. 용서란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진심이 담긴 말을 비로소 건넸을 때, 과거의 어떤 순간들을 돌이키며 그 순간이 기억 속에서 분노에서 용서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록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병실에 누워 거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아들아 미안하다’라고 말은 했지만, 그 미안하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자신의 감정이 다혈질인 상태에서 일으킨 사건에 대한 미안함인지 생애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에게 가했던 상처에 대한 미안함인지 나는 구분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던진 ‘미안하다’라는 말이 포함된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도대체 그런 것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는 결국 물리적으로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 사실은 내가 살아있음으로써 증명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관념적인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자식인 나에게 기억력을 매개체로 전이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기억으로 전환된다. 죽어도 영원히 사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만난다. 꿈에서든 과거의 기억에서든 이렇게 글로 쓰는 순간에서도. 기억에 살아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될까?
나는 아버지를 용서한 적이 없다. 물론 아버지도 나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어떤 과정에 서 있다고 믿는다. 용서하지 않아도 용서해도 물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죽음 직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나는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앞으로도 삶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나마 살려두는 것이다. 그것이 화해하지 못한 아들이 내밀 수 있는 최대의 용서다.
나도 아버지처럼 늙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나도 아버지도 시간 덕분에 만났고 시간 때문에 서로를 잃었다. 시간이 우리의 방패가 될 것 같았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창이자 방패가 된다. 시간은 나도 모르게 무럭무럭 자라난다. 우리가 완벽한 어른이 되길 학수고대한다. 단 칼에 앗아가 버리기 위해.
더 이상 자라날 수 없을 때 우리는 남은 나날을 헤아려본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서로가 얼마나 사랑했을까. 얼마나 많이 아껴줬을까. 지금 헤어져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우리는 실컷 행복했을까. 하지만 우린 대체로 만족하지 못한다. 여전히 불안하고 어딘가 미심쩍다. 아껴온 말들, 나중에 전할 거라고 서랍 속 어딘가 꾹꾹 눌러둔 말들이 그때 되살아난다. 미움의 말들은 결국 사라지고 그리운 말들이 옆구리를 마구 찔러댄다.
사랑한다는 말, 혹은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고맙다는 말. 그런 말들은 가을 잎사귀처럼 날아가 버렸다. 바싹 말라버렸다. 비틀어져서 누군가의 발에 밟힌 나머지 바스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