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불화를 목격하게 될 때마다 나는 책상 밑이 마치 거대한 고래의 뱃속이라고 생각했다. 그 공간엔 믿기 힘들지만 아늑하고도 안전하며 오직 나라는 존재만이 가득 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바깥에 있을 때보다 책상 밑에서 그 깊은 어둠에 스며들며 어둠과 하나가 될 때, 더 완벽한 내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세계로 빨려 들어감으로써 나의 근본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
나는 어딘가로 도피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또 하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어떤 남다른 말로도 정의가 불가능한 에너지가 그곳엔 항상 숨 쉬었다.
그때 내 나이가 아마도 8살 내지는 9살쯤 되었을 거다. 처음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그곳을 찾았지만 나중에는 부모님의 싸움과는 상관없이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으로 숨어버렸으니 어쩌면 고래 뱃속 같은 공간이 작은 나를 길러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 무렵부터 어디론가 도망치고 숨으려는 역사가 무럭무럭 자라났을지도 모르겠다. 책상 밑의 공간이란 건 늘 그랬다. 언제 숨어도 나를 포근하게 반기는 낯설지 않은 곳.
책상 밑이 아닌 세상에서는 미움, 혼란, 공포, 두려움, 증오가 늘 거머리처럼 붙어 다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끔, 아니 거의 매일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다툼을 벌였으니까. 몇 개 남지 않은 물건이 공중으로 날아가다 바닥에 꽂히거나 아예 박살이 나는 경우가 잦았다. 뭔가 깨지는 소리만큼 내 마음의 어떤 근원적인 부분에도 금이 갈 정도였다. 설마 그러다 나도 같이 날아가는 건 아닌가 싶어 더 책상 밑으로 더 깊이 도망쳤을지도.
책상 위에 담요 같은 걸 덮어두면 시야가 사라지긴 했으나 양초 같은 물건이 있었으므로 암흑 따위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더 보호받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내가 안락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곳이 채 1 평방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만큼의 자유가 확보되었다는 걸 동시에 의미하기도 했다.
난 그곳에서 희미한 양초 불에 기댄 채, 책 한 권을 꺼내고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금세 현실로 환기되곤 했다. 동화라는 건 원래 그렇다. 현실과 너무다 다른 이상의 세계가 아닌가. 삶과 죽음, 언제 꺼질지 예측이 가능한 촛불의 생명력만큼 삶은 짧기만 한 건지, 그때 이미 알았다. 읽고 있는 책이 얼마나 길지 가늠할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그만큼이 되려나. 알 수 없지만 난 책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보이지도 않는 글자를 더듬으며.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책상 밑처럼 어두운 곳을 자폐 공간이라고 부르는 걸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실존적 안정감을 확보했으니까. 세상의 혼란으로부터, 부모님의 증오로부터, 심지어는 가난함까지 완벽하게 분리되었으니까. 나는 오직 그 공간에선 나로서 다시 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책에게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지고 혼자 답하는 놀이를 즐겼다. 그건 놀이이기도 했지만 하찮은 일이기도 했다. 나는 주인공도 될 수 있고 그 어떤 주변 인물도 동시에 될 수 있었지만, 더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매몰되어가는 부작용도 있었으니까.
여덟 살 난, 시어는 침대 위 텐트 속으로 자주 숨는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의 이야기다. 시어에게 있어서 그 행위는 놀이도 취미 생활도 아니다. 그러니까 유령들의 차가운 입김으로부터 멀어지는 최선의 길이었다고 할까. 아주 작고 가냘픈, 그저 헝겊 조각에 불과한 피라미드 모양의 뜰 안에 쪼그려 앉아, 어둠보다 더 무서운 공포들과 격리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자폐의 공간도 몰입을 위한 치밀한 작전도 아닌 셈. 그저 도피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쨌든 안전하다. 정신이 퇴행하지도 않았고 삶을 부정하는 자세를 갖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적당한 선을 지킬 뿐이다. 다만 그때를 그리워하는 아이로 이유 없이 돌아가기도 한다. 그만큼 내가 사는 공간에 여백이 사라졌다는 얘기일까. 이제 나는 어른이 되어서 자폐 공간으로부터 기어이 졸업은 했으나, 여전히 또 다른 졸업을 꿈꾸고 있으니, 나에겐 아직도 고래 뱃속 같은 공간이 절실해진다는 이야기일지도. 어른은 됐으나 내면 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까마득히 어두운 책상 밑에서 어딘가를 더듬거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