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이유 없는 슬럼프란 과연 존재할까? 가끔은 설명하기 곤란한 어떤 무기력한 터널 속으로 내 안의 모든 존재들이 침몰하고 만다. 인생은 그런 면에서 길고 기약 없는 항해다. 목적지가 분명해 보이지만 사실 신기루인, 무의미와 유의미 사이에서 솟아오른 가짜 우물 같은 것일 따름이랄까. 그렇게 출렁출렁 위태롭게 살아가다, 인생의 끝에서 결국 나는 침몰을 겪을 테지만, 그래도 인생은 충분히 노를 저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를 내려본다. 슬럼프 따위에게 운명을 맡길 순 없을 테니까.


세상이 갑자기 가라앉을 것 같은 위기의 순간, 슬럼프가 언제 시작됐는지 그 시점은 알 수 없어도 현재 슬럼프 한가운데를 지나간다는 사실은 잘 안다. 다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그 슬럼프를 조금 이해할 수 있고 위안이나마 남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글을 쓰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달콤한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가져왔다. 머그컵에 반쯤 담긴, 비교적 안정된 커피의 다뉴브 강 같은 잔물결을 보면서 나는 또 이렇게 익숙한 감정에 휩쓸리고 마는데, 넌 지금 나와는 반대 편에 서 있구나,라고 한숨을 내뱉는다. 이런 순간마저 글을 쓰기 위해 억지로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위기는 찾아오게 마련이니까. 물론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또 다른 인격은 냉정하게 한 마디를 내민다. ‘언제 그런 게 한두 번이었어?’라고. 그래, 한두 번이 아니니 미칠 노릇이다. 이유도 없이 노크도 없이 찾아와서 사람을 침몰시키니.


오랫동안 글을 써오고 있다. 깊고 검은 어딘가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세계는 침울하고 축축했으며 발을 디디면 한없이 밑으로 꺼지는 곳이었다. 그 음침한 곳은 스스로 부정당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애초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당하는 게 나으니까. 그런 세상을 판독해보려고 노력해봤자, 여정 중에 생을 마치고 말 테니까.


사람의 그늘진 면은 그 사람에게 토착화된 것이어서 숨기려야 숨길 수도, 감추려야 그럴 수 없다. 부정할수록 더 도드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 사람의 말투에 묻은 어떤 고정적인 패턴들, 고치고 싶지만 떼어낼 수 없는 위악 같은 것들이 난무하다. 공존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나라는 괴물을 빚어낸, 단어와 문장은 오랫동안 나를 조각하거나 치장하며 키운 셈이다. 그런데 만약 나를 대표하는 단어를 지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목하고 웃음만 가득한, 아주 이상적인 가정, 동화 속에서나 이뤄질 법한 환경을 한때 꿈꾼 적이 있었다. 그런 화목한 가정은 이웃집의 창문보다 훨씬 멀었지만.


사실, 글을 쓰면서 진솔함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늘 생각해왔지만, 그런 이상적인 단어는 외면하고 살았다. 그래서 한동안 글은 내가 쓰지만, 그 속엔 내가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나는 어쩌면 나를 추상적인 인간으로 대했던 것 같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절망에 빠지며.


침몰해가는 나의 또 다른 존재를 허무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외면하고 싶은 사람이 자꾸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우리 집엔 책상 밑 세상만큼이나 암흑뿐이었다. 아버지는 건드리는 사업마다, 거의 다 잘 안됐다. 안됐다는 건, 경제적으로 형편없다는 사실을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궁핍은 사람의 의욕을 상실시킨다. 의지만으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 사람이 희망을 잃게 되면 보통 두 가지에 빠진다. 하나는 도박, 하나는 술, 아버진 불행하게도 도박을 선택했다.


바둑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알았다,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나는 너무 일찍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도박은 직장과 사업을, 가정까지 집어삼키고 말았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 있다. 도박에 미친 남편이 장롱을 샅샅이 파헤쳐가며 비상금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는 장면. 나는 그런 장면을 TV가 아닌 현실에서 봤다.


집안이 몰락해가는 걸 바라보면서, 마치 관찰자의 시선으로 조금 멀리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는 게, 불타서 침몰하는 난파선을 뗏목 위에 앉아서 허망하게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여기게 될까? 유년시절, 청소년 시절의 존재가 그런 악몽 같은 과정을 지속적으로 겪었다면 먼 훗날 나에게 그 기억은 어떤 작용을 하게 될까?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부정적인 어휘를 즐겨 사용했다. 원망, 체념, 분노, 침울, 비토가 섞인 문장을 자식들 앞에서 쏟아냈다. 비수와 같은 문장들, "당신이 우리 집을 망쳤어, 이 원수 같은 인간아, 너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현실에 생 지옥이 있다면 그곳이 맞겠다는 생각, 아마 그때부터 세상과 나를 차단시킨 것 같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벽을 높다랗게 세우는 방법으로.


부정적인 언어를 쓰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은 싫어도 그 언어가 만든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모방의 습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인간이 가진 학습 능력일 테니까. 하지만 사람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 학습받은 대로 살아갈 것인가, 다른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것인가,라고.


무능력한 아버지를 보면서, 나에게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가 생겼기 때문에, 나는 어두운 면이 아닌 밝은 면을 찾아가겠다고 의식적인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나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 중일까? 반대의 길을 개척하는 중일까? 모르겠다. 반대로 살아가려고 적어도 노력은 했으니까, 아침마다 거울 앞에 나타나는 증거를 지우려고 애쓰는 중이니까, 그나마 지금처럼 조금 밝은 세상에서 숨이라도 크게 쉬면서 살아간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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