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대물림하지 않는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자기중심적이라고, 자신만을 편애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물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 지구 상에 과연 있을까? 사랑이 너무 깊어지면 나르시시즘이 될 수도 있다지만, 그런 상태까지 경계하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 것이고.


처음부터 우리 부부가 딩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딩크가 됐다.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우리를 폄하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결정 사이를 과연 좁힐 수 있을까?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게 애국이 아니라면 그분들은 국가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딩크를 결정하기까지 꽤 많은 고민이 있었겠지만, 영향을 끼친 사건은 각자가 경험한 세계에 담겨 있었다. 아내와 나는 각자의 사정으로 상처를 경험했고 그것을 스스로 극복해냈다. 상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그것을 감당하는 몫은 온전히 자신에게 있으며, 사건의 발생 원인을 따지기 전에 결과를 수습하고 비슷한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 역시 당사자에게 있다. 나는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도박 때문에 가정을 버렸고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계를 대신 떠맡았다. 불안정한 가정환경에 버려진 나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고통 없는 밤이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울 수도 없었다. 내가 울면 어머니가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때 생각했다. ‘사는 것이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구나. 그렇다고 죽는 것을 택할 정도로 내가 용기가 있는 사람도 아니구나’라는 사실. 나는 그런 삶에서 언제나 도망만 치려고 궁리했고, 삶을 바꾸어볼 결심이든 행동이든 그 어떠한 실천적인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이 나를 찍어 누르는 동안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둔감하게 누워 하루가 제발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아내도 일찍 상처를 겪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장모님과 외로운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아내는 사춘기의 방황을 꿈꿀 여유조차 없었다. 사회에 빨리 진출하는 길이 힘든 어머니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길이 었기에. 아내와 나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갖고 살았으며 고통이란 것은 삶에 늘 상처를 안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한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여전히 이기적이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에 몰입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각자가 겪은 고통의 씨앗을 다시 대물림해줘야 될지도 모르는데 아이라니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두려움 역시 숨길 수 없었다. 아무리 우리가 자식에게 고통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다짐해도, 한 사람이 짊어져야 할 낯선 고통을 어찌 막아줄 것인가? 차라리 고통을 없애는 길이란, 아이를 낳지 않는 길뿐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그 판단이 어리석을지라도.


영화 <나비 효과>에도 그러한 장면이 나온다. 잘못된 미래를 고치려고 주인공이 과거로 무수하게 돌아가지만, 모든 노력은 또 다른 미래의 고통을 낳기만 한다. 주인공은 결국 어머니 뱃속에서 탯줄로 자신의 목을 감아 자살하는 것으로 고통을 끊어버린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고통을 막는 방법은 씨앗을 아예 잉태하지 않는 길이다. 비겁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고통이 네 것이 아닌데 왜 자식의 고통까지 참견하려 드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은 얼마든지 던질 수 있겠지만, 대답은 당사자가 내리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 부부는 고통을 더 이상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방식으로 각자 진화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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