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오랫동안 퇴사자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거 외에 '백수'라는 신분을 더 오래 장착하고 살았다. 하지만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그런 무직 상태를 아버진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아버지의 장기 퇴사 신분을 더 부끄러워했다는 사실.
학교에서 뭔가 조사할 거리를 받아 들고 집에 도착하는 날마다, 나는 그 하찮은 종이 조각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게 싫었다. 직업란에 적을 것이 변변치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채워질 것들은 ‘회사원’ 같은 평범한 단어로 위장될 게 뻔했으니까. 난 그런 아버지의 허술한 가면 뒤에 숨겨진 모습이 부끄러웠다. 왜 우리 아버지는 직업을 가지지 못했을까? 왜 우리 집은 어머니가 이끌어가야 하는가? 난 왜 일찍 철이 들어버렸을까? 이런 의문은 늘 머릿속에 가득 찼지만 그 누구한테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늘 실직 상태에 머문 건 아니었다. 나름 노력이란 걸 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열심의 이면에는 큰아버지의 적잖은 희생이 따랐다. 아버지는 늘 사업을 한답시고 사고를 쳤고(도박으로 집을 날려먹는다든지, 직장에서 공금을 유용한다든지) 큰아버지는 그때마다 어떠한 책임이든 다 뒤집어써야 했으니까. 큰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건 어느 정도 아버지에게 부채가 남아있었으리라.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결코 게으른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백수인데 게으르지 않다, 뭔가 모순적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장기 퇴사자의 신분을 놓지 않으면서도 근면성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까. 새벽이면 등산을 한답시고 어김없이 나를 깨우고 남한산성을 오르락내리락거렸고, 배낭의 커다란 물통엔 약수가 가득하게 담긴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으니까. 그런 부지런한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무책함에 면죄부를 받았다.
가난한 집의 아이는 대개 철이 일찍 드는 편이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2학년 시절, 나의 유일한 취미는 소년중앙 같은 잡지에 하루 종일 심취하는 것이었는데, 한 권의 잡지와 쌀의 값어치가 비슷하다는 결론 탓에 유일한 낙이었던 잡지조차 구독을 끊어버렸으니까.
아버지의 무능력함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아버지의 일과로도 가려질 수 없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아버지의 실직 상태가 길어질수록 묘수라고 생각했던 모든 수는 악수인 경우가 대분이었다는 사실. 악수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수는 아버지가 출판 사업에 손을 댄 일이었다. 아버지는 동업으로 출판사를 하나 차리더니 종로에 그럴듯한 사무실을 하나 개업했다. 그래, 요즘 말로 정년 퇴임한 사람이 치킨가게를 오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아무런 경력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 오직 자신감 하나만으로 좋아하는 일에 손을 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눈으로 목격했으니까. 아버지의 출판 사업 때문에 우리 집은 더 폭삭, 아니 완벽하게 망해 갔으니까.
대학교 졸업장을 받기 전에 한 회사에 입사했다. 첫 번째 월급을 받아 들고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은 이 돈을 10년 내에 최소 10배로 불릴 거라는 각오였다. 그리고 절대로 나는 장기 실업자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도 함께 복리 이자로 불리겠다고 선언했다. 10년의 계획은 계획으로 끝났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23년이 지나갔다. 난 단 한 번의 실업자는커녕, 일주일 이상을 쉬지 않고 아버지처럼(?) 근면 성실하게 일만 했다.
아버지를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아버지와 같은 삶을 절대 살지 않겠다고, 그런 결심이 흐트러진다면 나는 사람도 아니라고. 한 번씩 퇴사하고 싶은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내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버텼다. 살다 보니 버티고 참는 것이 특기가 된 걸까? 지금은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무던하게 오래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도, 강의하는 사람도,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도 나는 꾸준하게 해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역설적이게도 나는 실업자의 삶을 꿈꾸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미워하던 아버지의 습관을 닮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실업 상태와 나의 결은 다르다고 우긴다. 나는 적어도 집을 날려 먹거나, 집에 쌀이 떨어지게 하는 일은 일어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인생은 자신감으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