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에 새겨진 코드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바둑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눠진다.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 선택은 내가 주도하고 내가 결정한다. 다만 방어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계속 그렇게 도망만 다니다 게임이 끝날 확률이 높다. 도망 다니는 사람은 도망하는 기술만 늘 테니까. 그렇다고 공격하는 쪽이 전적으로 유리한 것도 아니다. 주변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짐작하지도 못하면서 경솔하게 공격만 하다가 오히려 도망가는 쪽이 정교하게 파놓은 함정에 빠질 공산이 클 테니까. 그러니 어느 쪽이 맞다고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상황에 따라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좋겠다.


아버지의 사업이 폭삭 주저앉은 후, 아버지는 수중에 돈이 생길 때마다 기원으로 향했다. 집에 머무는 시간보다 기원에서 숙식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머니의 시야권 내에 들어 있는 그런 동네 주변의 기원만 찾았다. 기원은 나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나는 바둑이 너무 좋아서 순수하게 취미를 나눌 요량으로 어른들이 기원을 찾는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기원의 분위기만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 건 7살짜리 꼬마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눈을 일찍 뜨면.


자욱하게 깔린 담배 연기를 사이로 바둑판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다 보면 구석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타났다. 마치 허연 구름 속을 헤치고 나타난 도인과 같은 풍모를 지녔으면 좋으련만, 그런 분위기는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에 담배가 찌든 나머지, 마치 매실 장아찌가 썩은 모양새라고 하면 딱 맞았을까. 그렇게 아버지는 매일 몇만 원의 돈을 어머니에게 뜯어 내고 기원을 찾으면 그걸 다 잃어버리고 좀도둑처럼 발견되곤 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온갖 망신과 수모의 말을 듣고 질질 끌려 나와야 했다.


그런 사건이 습관처럼 반복될 때마다 나는 바둑 따위는 절대 배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 따위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저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억압된 본성, 숨길 수 없는 유전자에 새겨진 코드 때문에 나 역시 아버지의 길을 밟게 되는 것이다.


단연코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바둑을 도박적으로 두지 않았다. 물론 도박과 꽤 흡사한 형태로 바둑에 근접한 적은 있었다. 그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때 그렇게 바둑에 빠져들었던 것은 싸움 때문이었다. 싸움은 무조건 이기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기에 말이다. 어떻게든 그 싹이란 건 어린 왕자의 B612행성의 바오바브나무의 그것처럼 잘라버려야 했지만.


나는 군대에서 바둑을 배웠다. 나에겐 어쩌면 아버지의 바둑 코드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어느 날 갑자기 이해 못할 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대원들과 바둑을 두게 됐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 컸다. 호기심이 사람을 버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호기심이 나를 버리진 않았다. 다행이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바둑을 그저 게임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도박으로 번져가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군대에서 나는 바둑을 상대를 이기려고 시작했다. 군대 내에서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 모두가 아군이니까. 그곳은 이기는 것보다 생존한다는 명제 자체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바둑은 그 누구든 찍어 누를 수 있었다. 그들을 내 손아귀 안에 둘 수가 있다는 얘기였다. 이상한 것은 나는 그 바둑을 너무나 쉽게 익혔다는 사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코치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저 옆에서 누군가 바둑을 두는 걸 구경했을 뿐이었다. 정석이든, 묘수든 그런 것은 익힐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재빠르게 바둑을 익혔다. 그리고 소대원들을 한 명씩 제쳐버리기 시작했다. 그 누구든 내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더 깊게 바둑을 배우려고 비굴하게도 아버지에게 소포를 요청했다. 바둑을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아버지는 정석 사전 한 권을 나에게 보내줬다. 나는 그 책 덕분에 더 빠르게 바둑의 고급 스킬을 익혔다. 그리고 모두를 완전하게 이겨버린 다음, 승부가 싱거워지자 바둑판이든 바둑알이든 그냥 내 시야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그냥 바둑이란 게 시시해진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무대로 나간다는 사실, 그 사실이 아버지에게 기대를 만들까 싶어, 그 사실이 싫어서 단 한순간에 그만둬버렸다. 그리고 지금 바둑은 나에게 있어서 그저 알까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아버지가 한 가지에 집착하다 중독된 나머지, 인생을 도박에 바친 것처럼 나는 그런 인생을 따라 하지 않는다. 유전자에 코드 따위가 새겨져 있다고 한들 얼마든지 나는 그것과 다르게 살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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