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원인이 있으니 불행한 결과가 따른다는 정의에 의하면 현재의 나는 기분 나쁜 원인에게 종속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그 원인이라는 것은 찾으려야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찾다가도 내가 불행에 얽매이는 인간이 된 것 같아서 그만둔다. 또한 찾으려고 생각하고 생각을 애써 글로 표현해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원인과 더 떨어지는 느낌, 알려고 할수록 더 모르는 이야기들만 늘어나는 것 같다.
현재의 나는 어떤 원인의 토대로 세워진 튼튼한 건축물 같은 것이 아니다. 현재의 나는 오직 현재로서 즉 나의 실존으로 세워진 가설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실존은 어떤 양식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그 증명은 오직 스스로 해내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사고하는 것으로, 단순한 것들을 추상적으로 대하는 나만의 세계관의 구축을 통해서 다른 모양으로로 새겨지는 것이다. 나의 세포 속에 하나씩 하나씩 각인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다른 것이 나와 나 사이의 것인지, 타인과의 경계에 놓인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만약,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과거가 불행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나는 연속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존재가 된다. 인간으로서 실존하려는 노력은 과거에 겪은 불행 덕분에 끝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불행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건전한 양식이 아닌가.
실존 그리고 본질, 나의 존재는 순수하게 어떤 결정체로서 작용하는 걸까. 나는 왜 글을 쓸까, 그리고 글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는 걸까. 나의 오래된 불행의 원인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까. 모든 불행의 씨앗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됐을까? 아니면 그전에 일어났던 더 먼 과거의 어떤 시점이 원인이 됐을까. 이렇게 쓰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렇게 단순 반복적으로 쓰기만 한다면 불행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불행이란 것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의 상태였다가, 갑자기 유의 상태로 바뀐 것처럼 나는 우연하게 일어난 그러니까 글을 쓰는 작업 덕분에 불행을 극복하는 것이다. 인생은 필요에 따라, 불행이든 행복이든 그때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뿐이다. 그러니 왜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 억지로 찾아내거나, 그것에서 벗어나겠다고 발악할 필요도 없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시간에 따라 나의 형체도 계속 변해가고 있으니까, 어느 한 곳에 정체될 이유는 없다.
인생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단다. 나 역시 그러니 불행한 걸까? 나 스스로 질문을 설정해놓고 대답을 요구한다. 고민하다 보면 내면과 내면이 충돌한다. 주저하는 쪽과 맞서는 쪽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 어렵다. 불행하다면 불행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는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 달라지기 때문에 대답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대답은 유보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자제품 다음 신모델 출시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끝이 없을 것이다.
인생에 불행한 이력들이 너무 많아서 행복이 끼어들 구석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론이라면 그것들을 내다 버리는 것이다. 마치 당근 마켓에 중고물품을 팔아 치워 버리듯 말이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여기서 버리라는 의미는 기억에서 완벽하게 지워버리라는 게 아니다. 일종의 제사 의식과 비슷한 작업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과거의 불행한 일들을 무의식의 세계에서 꺼내고 저너머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제때 처리하지 못한 불행한 감정은 불행의 목록에서 언제든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마치, 좀비처럼 말이다. 녀석의 심장을 노리지 않는다면 좀비는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그러다 행복을 아예 잠식해 버리는 사태에 이른다. 말하자면 본질이 아닌 것이 본질을 매우는 형국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행의 목록이 폭발해 버리기 전에 꺼내서 의식을 치르고 보내야 한다. 되살아날 틈이 일어나지 않게끔, 뇌세포를 계속 작동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찾아올 행복한 날을 그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