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모르잖아요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암사역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니 매섭게 생겨먹은 빗방울이 한꺼번에 쏟아져내렸다. 거대한 폭우였다. 마침 여러 대의 버스가 도착해서였을까. 밀물처럼 쏟아지는 사람들과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듯 퍼부어대는 빗방울들이 교묘하게 어우러지는 기분이 참 묘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쏜살같이 그러니까 번개맨처럼 지나가려는데, 비대해진 몸뚱이 때문인지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인생의 어떤 시점으로 갑자기 이동되고 말았다. 물론, 실제로 내가 시공간을 뒤틀어버렸다는 건 아니다. 그냥 기억 하나를 재생한 게 전부다. 소설을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터. 지나치게 진지하게 글을 읽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 아무튼, 나는 중학교 3학년 어느 날로 돌아갔던 것 같다. 딱히 과거 떠올리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써야 할 소재가 고갈되면 이 잡듯 뒤져보는 편이긴 하다. 뭐, 내 몸에서 이가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 부분은 오해하지 말길 바라지만...


수학여행인지 극기 여행인지 어렴풋한데, 아무튼 오늘처럼 매서운 폭우가 쏟아지는 날로 기억한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학교 앞 도로 옆에 새벽부터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우산을 들고서 천 명이 넘는 녀석들이 한꺼번에 버스에 올라타야 하는 장관을 연출해야 하는데,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선생들은 - 선생님이라고 부를만한 인격을 갖춘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나는 선생으로 그들을 호칭한다. - 비 오는 날 타작하듯 우리를 두들겨 팼다. 뒤통수를 후려갈기기도, 줄을 제대로 서지 않는다고 왼쪽과 오른쪽 뺨을 동시에 손바닥으로 마사지를 해주기도, 이유도 없이 피구 공 놀이하듯 자주 맞았는데, 그날 아침은 더 심했다. 아무튼 기억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자꾸만 이유 없이 살아나는 게 있다. 오늘처럼 굳는 날에는 더욱더.


왜, 그날의 악몽 같은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지 쓰면서도 도통 내 판단을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멈출 수도 없다.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냥 가보기로 한다. 아무튼 결국 그 많은 아이들이 버스에 올라타긴 했다. 비교적 안전하게, 오히려 선생들이 우리에겐 위협의 대상이었으니, 천 명이 아이들이 동시에 이동할 때 터질법한 안전사고보다는 선생들이 더 사고를 만들었지 싶다.


뭐, 아이들이란 원래 그렇지 않나. 여름날의 폭우처럼 소란스럽고 시끄럽고 야단스러운 편이 아이들이 가진 습성일 것이다. 게다가 학교를 벗어나서 어디론가 멀리 떠난다는데 어찌 흥분할 이유는 만들지 않았겠나. 나는 못돼먹게 생겨먹거나 수상쩍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모범생들이 앉는 앞자리는 딱히 선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맨 뒷자리로 과감하게 이동하려다, 그래도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소심하게 뒷자리 바로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전날 아버지가 사주신 소형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꺼냈다. 와. 이 대목에서 그 기억이 소환될 줄이야. 이렇게 기억이란 건 단서 하나가 미끼가 되어 그다음 장면과 사물을 소환해댄다. 연두색이 흐르는 소형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기억날 줄이야. 이어폰은 굳이 꽂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름의 스피커가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찰리 식구들처럼 달려 있었기 때문에, 또한 옆자리에 앉은 녀석과 음악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에.


연두색 소형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엔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 테이프가 들어있었다. 건전지가 얼마나 오래 버틸지 알 수 없었지만, 난 그 노래를 감추고 있다, 입 바깥으로 시원하게 배출했다. 난 속에 들어있던 응어리 같은 것을 울컥, 하고 뱉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70명이 넘는 녀석들이 어느 순간 동시에 합창을 해댔으니 우리는 그 순간에 동질성을 분명 획득했을 것이리라.


그런데, 뒷자리에 앉은 녀석들은 역시 범상치 않았다. 굉장히 문제적인 인물들로 낙인이 찍힌 이력답게 그들은 격이 다른 음악을 들려줬다. 나는 그 시절에 주다스 프리스트는 'Before the dawn'이 전부인 줄 알았다. 주다스 프리스트 하면 당연히 'Before the dawn' 아냐?라고 우겨댔던 거다. 마치, 팝 칼럼니스트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들려준 것은 'Breaking the law'였다. 내가 들은 주다스 프리스트는 늘 얌전했는데, 맙소사, 그 목소리와 멜로디는 한없이 공포스러웠다. 어디, 지옥에서 막 소환된 악마의 형상 같았다고 할까? 역시 문제성을 갖춘 인물들은 음악도 반사회적인 것들을 듣는 게 취미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문세가 최고라고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리고 나중에는 몰래 'Breaking the law'를 더 자주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늘 난 내 방식만 고집했고 내가 보는 세계가 최고라 믿었으며, 오직 내가 보던 방식으로만 세상을 보려 했으니까. 살다 보니 이문세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말이다. 인생의 새로운 지점으로 도약할 때마다, 이문세와 같은 환영은(?) 내 뒷덜미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러니까 이문세와 주다스 프리스트의 경계는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적군 취급하고 있었달까.


와, 둘이 싸우는 거 이제 지겹다. 나도 이제 주다스 프리스트로 슬슬 넘어갈 때가 되지 않았나. 이제 뭔가를 부숴버릴 시점이 되지 않았나. '난 아직 모르잖아요'는 이제 그만 듣고 깨뜨리고 박살 내는 세계에 뛰어들어 보는 거다. 다 부숴버리자. 박살 내버리자고. 우물 안에서 이제 바깥세상으로 틀을 깨고 뛰쳐나갈 테다. 아, 그런데 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펴자. 그런데 지금 들어 보니 이거 꽤 싱겁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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