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는 건 그 과거에서 벗어났다는 걸 의미한다.
이등병 시절, 외박이란 걸 난생처음으로 허락받은 날의 기억이다. 강원도의 봄은 보통 서울보다 훨씬 더딘 편이다. 겨울인 듯한 봄이 막 시작되었을 때, 서울에서부터 강원도 인제 서화리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먼 여행 떠나듯 계절을 거꾸로 돌아 나를 찾아왔더랬다. 오월이어도 햇살과 가까운 곳이 아니라면 을씨년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월에도 눈이 내리는 곳이라니, 그런 풍경을 과연 서울에서 상상할 수 있으려나.
아버지를 터미널에서 만날 때마다, 특이한 것은 아버지 등에 실린 아버지 키보다 한 뼘쯤 더 큰 배낭이었다. “허리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의 배낭이라니 저 가방 속엔 대체 어떤 물건이 들어있을까?” 내 머릿속엔 물건에 대한 호기심보다, '대체 창피하게 저런 뭉치를 들고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내 머릿속에선 어떤 장면이 자동적으로 그려졌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시외버스 뒷문에서 느리게 내리고 다시 이곳 서화리까지 성큼성큼 걸어오는 장면”. 몇 달 만에 만나서였을까? 우리 부자간엔 어떤 친밀함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는 건, 빳빳하게 다려진 내 군복 표면의 감촉과 아버지의 큼지막한 배낭에 실린 물건들이 설명했다. 우린 형식적이나마 짧으면서도 명료한 인사를 나눴다. 무사히 잘 지내서 반갑다는 말, 훈련은 견딜만했냐는 질문, 강원도의 5월은 예상보다 춥다는 그런 난데없는 말. 의례적인 인사말들이 오고 갔다. 나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다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던지는 게 전부였다. 그만큼 나는 아버지를 여전히 외면하고 싶있던 것이다. 한편으론 “얼마나 힘들었니?”라고 아버지가 물어주길 기대했지만 그런 말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기류는 어색해도 어쨌든 가족이었으니까 어느새 우린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했다. 문득, 햇살을 즐기려고 풀숲을 헤치고 나지막한 산기슭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아무 말 않아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김밥 몇 조각을 의무적으로 넘겼지만 허기가 져서는 아니었다. 배낭의 무게를 빨리 덜어내야겠다는 생각뿐 다른 감정은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우린 잠시나마 고정적으로 머물 장소를 찾아야 했다. 집과 비교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런 아늑한 공간 하나쯤을 강원도에도 있을 테니까. 부대 옆 마을이 늘 그렇듯이 그곳에도 허름한 여관들이 즐비했다. 외박 나온 아들과 그 부모를 호화롭게 대접하는 오성급 호텔은 아니더라도 마음만은 편안함을 체감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궁전장’이라는 푯말이 서 있는 여관에 들어섰고 아버지의 배낭은 한쪽 벽에 비스듬하게 세워졌다. 하지만 배낭은 세워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옆으로 기다랗게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런 후진 곳에서도 취사 행위는 금지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배낭에서는 예상치 못한 물건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취사 금지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가스레인지를 비롯하여 소뼈를 우려낸 국물이 담긴 통, 치킨, 떡볶이, 튀김, 온갖 나물 반찬, 새 김밥까지, 군대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음식들이 즐비하게 차려졌다. 끊임없이 뭔가가 튀어나오는 배낭을 나는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먹고 또 먹고 그러다 잠에 빠졌다. 그렇게 무위하게 시간을 보내도 하루는 지나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24시간은 변함없는데, 그때는 왜 지금보다 더 빠르게 시간이 달아났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세월이 흘러 나도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고, 그때의 배낭도 음식들도 또한 아버지도 이제 사라지고 없다. 없는 존재를 생각하는 일은 참 힘들다. 그래도 궁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배낭에 관한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잠에 통 들지 못한 아버지의 사정은 배낭에 차곡차곡 쌓아야 할 잡화점 같은 물건들 때문이었다는 사실. 먹을 것부터 시작하여 즉석요리가 가능한 장비까지 챙기느라 이사 가는 듯한 진풍경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던 그날의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서야.
우리 집엔 자동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흔한 전화기 한 대도 없었는데 자동차라니. 아버진 대신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동서울 터미널까지 겨우겨우 이동했다. 그 배낭이란 걸 아버지는 아주 소중하게 다뤘다. 어쩌면 그것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몇 번의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시 고속버스 화물칸에 가방을 밀어 넣으며 기사에게 조심하게 다뤄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 사연을 들으며 자꾸만 눈 밑이 따가워지는 이유는 왜인지. 진실은 왜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밝혀지게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의 아버지의 고행에 대하여 그 어떤 의견을 낼 자신이 없었다. "무뚝뚝하고 냉정한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정이란 걸 낡은 배낭 속에 꾹꾹 눌러뒀겠구나. 배낭에 담긴 아버지의 흑백 사진 같은 기억도 이젠 안녕이구나. 아버진 자신의 감정에 대해 늘 솔직하지 못했지만, 물건에까진 감춰두지 못했구나 그래서 거기엔 아버지의 옛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겠구나", 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사실.
아버지의 배낭은 묵직했지만 거친 아버지의 감정만큼 속은 들여다볼 수 없었다. 아들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러니까 그저 깊고 넓은 바다 어디쯤의 버뮤다 삼각 지대 같은 곳이었달까. 배낭이든 그 속에 담긴 그 무엇이든, 어쨌든 아버지와 아들만이 통하는 어떤 길이 놓여있다는 사실은 30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받아들이게 됐다. 그때는 너무 어렸고 지금은 너무 늙어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