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존재를 절대 믿은 적이 없다. 일단 선물을 전달하는 사람이 왜 하얀 수염을 두른 빨간 재킷을 입은 할아버지여야 하는지, 굴뚝을 타고 다니는데 왜 그 하얀 수염에 검은 재가 하나도 묻지 않는지 참 신기했다. 게다가 TV에 등장하는 산타 할아버지는 모두 배가 ‘D’ 자 형으로 돌출했는데, 어떻게 그 덩치로 눈썰매를 타고 공중을 가볍게 날아다니는 지도 믿기 어려웠다. 모든 게 느릿느릿했는데 말이 안 되었다. 저런 건 동네 코흘리개 영훈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선물을 받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선물이 아빠로부터 나온다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으니까, 내게 신비로울 이유는 거의 없었다. 아빠가 “어떤 선물을 받고 싶어?”라고 슬쩍 내 의중을 캐물으면, 나는 속으로 “아빠 월급이 30만 원이니까, 만 원 이상의 선물은 절대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분명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른 말을 내뱉었다. 비싼 선물 같은 거, 이를테면 손과 발이 분리되거나 관절이 회전하는 로봇 같은 건, 동네 바보 형들이나 가지고 노는 거라고 말했다.
물론 나는 책을 갖고 싶었다. 그건, 바로 아이들의 로망인 세계문학전집이었다. 며칠 전, 영훈이네 집 책장에 꽂혀있던 50권짜리 계몽사 세계문학전집 말이다. 나는 그걸 갖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걸 사려면 아빠 월급의 1/3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쯤은 막연히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런 소원은 속으로 생각만 하는 게 최고였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어떤 소원이든 다 이루어지는 거니까. 내 상상의 세계가 깨지는 게 싫어 “나는 과자면 충분해. 난 국민학교 2학년생이잖아”라고 말했다.
선물이 무엇일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면서도 크리스마스 전날 밤은 뭔가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빤 그날따라 꼭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했다. 오늘 밤은 반드시 내 눈으로 선물을 확인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10시 11시를 넘기면 어김없이 눈이 풀렸다. 그렇게 스르르 눈이 감기면 다음날 새벽에 눈이 번쩍 뜨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습게도 눈을 뜨는 이유는 선물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지나친 웃풍이 단잠을 방해한다는 사실이 더 컸다. 어쨌든 잠에서 깨어났으니까, 난 선물의 정체가 궁금하여 일단 머리맡으로 손을 던져 놓곤 살살 흔들었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일단 손가락의 감촉으로 선물이 무엇인지 예측하고 싶었던 것이다.
난 이번 크리스마스도 종합 선물세트일 거라 짐작했다. 종합 선물세트는 아빠가 애용하는 크리스마스용 단골손님이었으니까. 내 몸집에 버금가는 그 박스 안엔 참 다양한 크기의 과자 박스가 들어 있었다. 초콜릿, 비스킷, 사탕, 평상시에는 단일품으로 만나던 과자들이 총체적으로 집합했다고 할까. 한마디로 양으로 끝장을 내겠다는 게 아빠의 심산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날은 뭔가 좀 달랐다. 일단 손을 휘저어봐도 잡히는 게 없었다. 음,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아빠가 선물을 누락시킬 일은 절대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아빠가 외박을 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 고개를 돌려보니 건너편엔 분명 누워있는 아빠가 보였다. 음, 그렇다면 내가 자다가 발광을 한 나머지, 선물을 위쪽으로 밀어버린 건 아닐까? 이런저런 추리를 먼저 하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머리맡을 확인한다는 게 너무 싫었다. 진짜 선물이 없기라도 한다면 그 실망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덮었다, 다시 목 부근까지 내리기를 반복하다, 용기를 내고 고개를 빠꼼이 돌려봤다. 휑했다. 정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동네 슈퍼에서 5천 원이면 사던 종합 선물세트도, 관절이 움직이는 로봇도 없었다. 아, 아빠가 또 직장에서 쫓겨나셨나, 이번 달 월급에도 뭔가 문제가 생긴 거구나, 엄마의 가계부를 내일 확인해야겠어.라고 나름의 진단을 내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곤 잠에 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따위 크리스마스 선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내일 동네 녀석들이 선물 뭐 받았냐고 물어볼 것이 분명하니, 며칠 동안 꾀병이라도 부려야겠다고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주 늦게 눈을 떴다. 나는 실망을 하지 않은 척, 이불을 개고 TV를 틀었던 것 같다. 성탄절 아침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가 하루 종일 상영됐으니까.
그런데 어딘가 좀 바뀐 것 같았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다 빈 책장에 뭔가 꽉 들어찬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건 분명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이었다. 동네 친구 녀석 집에 꽂혀 있던, 한 번 읽고 싶다고 청하면, 종이가 닳아서 안 된다고 거부당했던 동네 코흘리개 녀석이 가진, 그 책 말이다.
딱 거기까지다. 그 이후의 상황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결과가 너무 뻔한 결말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기대하지 않던 선물을 받았으니, 내가 아이처럼 겅둥겅둥 뛰어다녔을 거라고 짐작했다면, 당신의 생각은 틀렸다. 난 좋은 일이 생겨도 지금처럼 크게 흥분하지도 감격하지도 않는 타입이니까. 난 침착하게 책을 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중간쯤에서 한 권을 꺼내고 무심하게 앉아 읽었다. 그때 처음으로 고른 책이 아마도 ‘소공녀’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접한 문학은 '소공녀'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