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시간의 흐름을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다. 시간이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를 소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도, 쫓아가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시간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다.
하루는 마치 고무줄이라도 된 것처럼 제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한다. 스스로 똑똑한 비서가 되겠다며 시간을 분, 초 단위까지 추적한다. 주말은 일주일 동안 보낸 열심히 살았으니 열심히 잠만 자며 한 주의 피곤함을 위로한다. 그러나 나에게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면서 과거로 미뤄둔 목록들을 하나씩 꺼내 보고 있다.
삶에 또 다른 삶이 더해질수록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올라선 자리에서 버티기 위하여 나는 더 많은 시간을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시간에 보태려고 사력을 다한다. 사방에서 포화처럼 쏟아지는 요청과 목표들을 처리하려면 빈틈은 절대 허용되지 못한다. 그게 현재 나의 현실이다.
김영하는 산문집 "보다"에서 "어렸을 때는 시간이 한 달 단위로 흘렀으나, 어른이 되고 나서 시간이 귀해지고, 맹렬히 내 시간을 노리는 것들 투성이라고 했다."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는 이론만 깨닫게 만든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인 것일까?
목적도 없는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인정받기 위한 새로운 스펙을 쌓고 또 쌓는다. 방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웹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도서관일 수도, 일개 유머 사이트일 수도 있다. 밀리세컨드 이내의 응답 시간을 보장하는 서비스는 시간을 촉박하게 관리하는 나 같은 성급한 사람들에게 최적이다.
아주 어렸을 적 한 달에 한 번씩 "소년중앙"이라는 잡지를 읽었다. 말일이 되면 서점에 달려가 발행 여부를 확인했다. 구입하게 되면 방안 가득 퍼져 나가는 새 잡지 냄새에 감동했다. 그리고 나는 조급증 탓에 모든 걸 단숨에 먹어치워 버려고만 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나는 여전히 숨 가쁘다. 그래서일까?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동한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에서는 도시의 치열한 삶을 거부하고 섬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느린 삶(Slow Life)을 얘기한다. 영화와 함께라면 나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할 것만 같다. 느린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 삶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어릴 때 아버지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자주 데리고 갔다. 대형 서점의 규모 그리고 책장 가득히 꽂힌 책들이 적잖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중에는 방학이면 버스 타고 혼자서 교보문고를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에 앉아 책을 읽으면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나만의 세상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적어도 시간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을 읽고 나선,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구라는 공간 내에서 동일하겠지만, 각자가 느끼는 시간의 인식은 상대적으로 다를지도 모른다. 한 과학 실험에서는 서로 멀리 있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상대적인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을 동일한 조건으로 측정한 실험이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긴 했지만, 차이가 있음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20세기 초, 세기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미한 시간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의 흐름은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흐른다는 것을 증명한 발견이었다. 어쩌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는 서로 다른 시간의 선상에서 계속 살아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