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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07. 2021

스페인 여행기

운영자가 쓰는 '신나는 글쓰기' 미션

단편 소설입니다.


나는 공심대 장학생이다. 

(공심대 : 공대생의 심야서재에서 운영하는 대학)


나는 지난 4년 동안 공심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구르메 살롱방이 안방이고 신글방과 메시글방이 내 사랑방이다. 공심대가 내 가정이자 직장이자 터전인 셈이다. 내 삶 도처에 공심대가 물고기 비늘처럼 붙어 있다.


물론 나는 그곳에서 주로 돈을 소비하는 입장이다. 돈을 소비함으로써 나는 학습하는 인간이라는 지위를 얻는다. 아주 만족스럽지 않은가. 불만이라는 것은 단 1%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모든 모임에서 1등 장학생이 된 나를 칭찬하고 싶다. 글쓰기 모임에서부터 독서 모임, 서바이벌 퀴즈, 툴 강의까지, 모임이라면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모임에 매일 참석하려고 회사까지 퇴사했다. 내가 공심대에 쏟아부은 돈만(창업자금 기부까지) 환산해 봐도 벤츠 S클래스 한 대를 뽑고도 백만 원이 남을 지경이다. 이런 부지런하고 성실한 나 자신이 무척 사랑스럽다. 학교에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조금 더 완벽한 공심대 참석을 위해 지난주부터는 직장 대신에 스타벅스에 출근하고 있다. 스타벅스 죽돌이가 된 셈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자리, 그러니까 3층 꼭대기, 서울역 쪽방촌처럼 생겨먹은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열면 노트북과 스마트폰, 충전기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따라 나온다.


그렇게 매일 일을 아니 공심대 미션을 실행한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말이다. 그 덕분에 얼마 전 스페인 여행권이라는 상품을 획득했다. 가문의 영광이 아닌가. 시골 촌뜨기 출신인 내가 공심대에서 장학생이 된 것도 영광인데, 스페인 여행권이라니. 공심대에 나머지 일생을 바쳐야 되겠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해외여행은 난생처음이다. 기내식이 1+1이 아니냐고 클레임 걸어봤다가 옆자리에 앉은 아내가 아는척하지 말라고 면박을 준다. 뭐 그래도 괜찮다. 스페인이 아닌가. 공심대가 아니라면 내가 언제 이런 여행을 꿈꿔보겠는가. 고마운 공심...


뾰로통하게 서 있는 아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즐거운 여행이 아닌가. 남편 덕분에 모처럼 맞은 휴가가 아닌가? 아뿔싸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로밍, 로밍부터 처리하자. 로밍을 해야 오늘의 미션을 완료할 수 있다.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로밍부터 체크한다. 인터넷이 필수다. 장거리 여행 탓에 밀린 미션을 마무리해야 한다. 저 멀리서 아내가 짐가방을 낑낑거리며 끌고 온다. 끌려다니는 캐리어가 마치 썩은 표정을 짓는 듯하다.


공항 라운지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내곤 와이파이를 찾았으나 뭔가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불길한 느낌이다. 라운지는 또 왜 이렇게 더러운지. 


호텔에 도착하여 대충 짐을 던져놓고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다니다가, 배가 고파지자 3분 구시렁거린 후,  아무 레스토랑이나 들어간다. 살짝 눈치를 본 다음 빈자리에 앉아 익숙한 자세로 빠에야를 주문한다. 빵은 물론 공짜다. 올리브 오일을 잔뜩 발라 빵으로 배를 먼저 채운다. 남은 빠에야는 포장해 달라고 해야지. 아내더러 꼭 추가 빵도 포장해달라고 말한다. 앞에 앉은 아내 눈이 점점 매의 눈으로 변해간다. 왜 저러는 걸까? 태도가 아주 불량하다.




다음날 아침이다. 스페인에서 맞는 첫 번째 날이다. 오늘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방문할 예정이다. 물론 걸어서 간다. 편도로 7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2시간이면 된다. 아내가 또 옆에서 구시렁댄다. 여행 떠나기 전부터 계속 이런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드디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도착했다. 다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는 건지, 성당 앞에서 평생 사용하지 않던 안면근육을 사용하며 사진을 찍고 난리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저 성당이 왜 대단한 건지. 가우디가 누군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가이드 이름인가? 아우디는 내가 좀 아는데, 아무튼 가우디가 무슨 대수랴. 아내는 성당의 건축이 어쩌고 고딕 양식이 어쩌고 설교하느라 바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다. 어쨌든 공사 중인 건물이 아닌가. 완성부터 해놓고 관광객을 부르든지


배가 고프다. 일단 뱃속의 거지부터 달래야 할 것 같다. 2시간을 걸어왔더니 아우성이다. 성당은 오후에 다시 보자고 대충 거짓말을 던져놓고 아내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세 번째로 아내가 구시렁거린다. 아내는 구시렁 전문가임에 틀림없다. 20년을 넘게 살면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니, 이제는 내가 투덜거릴 차례다.


마침 스타벅스가 보인다. 성당보다는 스타벅스가 더 멋진 것 같다. 아쉬운 것은 3층 다락방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렴 어떠랴. 스타벅스인데,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최대한 조용한 자리를 찾는다. 아내에게 아아 투샷 벤티 사이즈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꺼낸다. 밀린 미션을 처리해야 한다. 바쁘다. 나는 성실한 공심대생이 아닌가.


열심히 글을 쓰다 보니 테이블 위에 아아가 놓여 있다. 완벽한 조합이다. 아내만 없으면 더 완벽한 여행이 됐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으며 아내를 잠시 본다. 못 본 척하는 아내. 대면 대면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아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뜬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라지 뭐.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2,000자 미션을 끝내야 한다. 10,000자를 쓴 사람에게는 책 한 권을 선물해준단다. 전의가 불타오른다. 2시간만 집중하면 가능한 숫자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 내가 스페인에 있다고 불성실할 거라 예측한 인간들에게 뒤통수를 날려야 한다. 집중하자. 아자 나는 할 수 있다!


타이머에서 알람이 울린다. 옆 사람이 눈을 흘긴다. 나는 느릿하고 여유롭게 알림을 끈다. 뭐 어쩌라고? 그럴 수도 있지. 너희들이 떠드는 소리가 더 시끄럽다고! 알람이 울렸다는 건 2시간이 지났다는 얘기다. 스크리브너를 확인하니 마침 10,000자가 넘었다. 완벽한 하루, 완벽한 인간, 나는 공심대에서 더 완벽해진다. 


그런데, 아내가 옆자리에 없다. 아까 분명 화장실 다녀온다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뭐, 지가 가봤자 어딜 갔겠는가. 이 먼 스페인이라는 타국에서, 길치인 아내가 갈 곳은 없다. 글이나 몇 편 쓰면서 아내를 기다리기로 하자. 아마도 파밀리아 성당에 갔을 확률이 높다. 성당 구경이나 하면서 언젠가 돌아오겠지.


저녁 시간이다. 점심에 먹은 건 모두 소화가 됐다. 배가 다시 고파졌다.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아내가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내는 오지 않는다. 성당으로 가봐야겠다. 


성당 바깥과 안을 뒤져도 아내는 없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불길함에 불길함이 덧칠해지는 기분이다. 아내가 사라진 지 8시간이 지났다.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어쩌면 토라져서 먼저 호텔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내는 길치다. 제대로 찾아갈 리가 없다. 혹시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닐까. 영화 <테이큰>이 생각난다. 


주위를 돌아본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할까? 음 나는 영어도 안되고 스페인어도 안된다. 내가 잘하는 건 오직 모국어뿐이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서 로비에 문의를 하자. 그곳이라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친절하게 알려줄 것이다.


호텔에 도착했다. 문을 따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헉. 이거 뭐야. 좀도둑이 먼저 드나들었나 보다. 캐리어는 입을 벌린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금고는 횡댕그렁하게 열려 있다.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달려가 보니 현금이 모두 사라졌다. 돈이 될만한 물건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건 아니다. 이건 내가 꿈꾸던 스페인 여행이 아니다. 침착하자. 정신 차리자. 현금은 없지만 아직 신용카드는 있다. 그거면 된다. 부족하다면 현금은 인출하면 된다. 일단 분위기를 살펴보자. 티브이 위에 공짜 생수가 있다. 원샷으로 들이켜자 침대 머리맡에 봉투가 하나 보인다.


이건 뭐지? 하얀 봉투다. 겉봉은 봉인되어 있다. 무슨 지령이 적힌 느낌이다. 겉봉투에는 From G.라고 쓰여 있었다. G? 뭐지. 뜬금없었지만, 나에게 보낸 것이 아닐까 싶어 침을 꿀꺽 삼킨 후 연다.




“나야. 당신이 지금쯤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이면 나는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일 거야. 놀랐지? 놀랐을 거야. 어쩌면 놀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침착해. 침착하게 굴어야 앞으로 벌어지는 사태에 적응할 수 있을 테니까. 


뭐 인생은 그런 게 아니겠어? 수많은 변칙과 변칙들 속에서 정돈된 합의를 찾아가는, 그게 당신이 좋아하는 공심대 철학 모임에서 배운 변증법 혹은 코스모스의 의미가 아냐?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그러니 잘난 척은 그만했으면 좋겠어.


뭐 이제는 그런 의미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요건부터 말할게. 당신은 이제 혼자야. 스페인에서 혼자가 아니라 당신의 인생에서 내가 이제 빠져나온 거라고. 나는 이제 당신 인생에서 발길을 딱 끊을 거니까. 나라는 사람은 그냥 당신이 좋아하는 스크리브너에서 글자를 지우듯 그렇게 지워졌으면 해. 나는 그냥 당신에게 없었던 사람이야.


당신은 좀 당해봐야 돼. 당신은 스페인에 와서도 공심대 뿐이더라. 나는 스타벅스 라테에 들어가는 바닐라 시럽만도 못한 존재더라. 난 당신이 그렇게 할 줄 알았어. 그래서 스페인에 떠나기 전 모종의 결단을 내리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당신은 내 생각에 확신을 심어줬어. 아주 고마워.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줘서.


미안하지만 모든 재산을 처분한 상태야. 물론 그 재산 형성에 있어서 당신이 기여한 게 거의 없어서 어차피 당신에겐 큰 영향을 미치진 않겠지만, 어쨌든 부동산과 주식을 모두 처분해서 내 계좌로 옮겼어. 연금이 남아있다고 안심하기엔 일러. 당신의 연금계좌까지 모두 다 내 것으로 돌렸으니까. 은행에서 전혀 의심하지 않더라. 와이프라고 하니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내 계좌로 다 옮겨주더라고. 그게 브이아이피 고객의 특권인가 봐.


날 찾을 생각은 하지 마. 아무리 찾아도 찾기는 힘들 거야. 나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야미쿠로가 사는 그런 소굴에서 살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리고 나는 한국에는 없을 예정이고 앞으로도 한국땅을 밟기는 어려울 거야. 당신은 수중에 땡전 한 푼 없겠지? 아마 살아가기 참 막막할 거야. 공심대 모임도 더 이상 참여하기 힘들겠네. 자기 먹여 살리느라고 너무 힘들었어. 이제 그런 짓 그만 할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내 옆에 누가 있는 줄 알아? 하하. 바로 공심이야. 당신이 그토록 의지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하던 그 공심 말이야. 공심대의 운영자 말이지. 그 사람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어. 우연이냐고? 천만에 그게 우연 일리가 있겠어? 다 우리의 작전이었지. 자긴 가물치처럼 그물에 걸려든 거야. 


우리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지. 당신을 속이기 참 힘들었어. 지금 공심님은 옆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어. 퍼스트 클래스 참 좋네. 뭐 한몫 단단하게 챙겼으니 공심대는 이제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 거야. 당신 같은 인간들 덕분에 공심님이 꽤 큰 재산을 모은 것 같더라. 아마도 A380 한 대 살 정도는 될지 몰라. 물론 농담이야. ㅎㅎ


잘 지내, 그리고 옛정을 생각해서 100유로 정도는 넣어두고 갈게. 그걸로 아르바이트 잘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 얻도록 노력해 봐. 당신 노력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빠에야도 가끔 사 먹고. 물론 한국에 돌아가도 집은 없을 거야. 집도 이미 처분했거든. 당신 짐? 그런 건 리사이클 시티에 모두 팔아먹었어. 별로 돈도 안되었지만.


아무튼 그래. 내 얘기는 여기까지야. 이걸 다 읽으면 편지는 자동적으로 타들어가게 될 거야. 그런 거 영화에서 많이 봤지? 그것도 공심대에서 알려준 건가? 그럼 안녕. 잘 지내. 무사히 잘 버텨보라고. 아, 참 신용카드는 내가 정지시켰거든. 참고하도록 해.


5초 후 봉투에서 불이 확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타들어가고 말았다.

모든 게 재로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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