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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08. 2021

부산행 열차에 올랐다

운영자가 쓰는 '신나는 글쓰기' 미션

뭘 그렇게 호들갑들일까. 이미 운명은 결정 난 상태나 마찬가진데…


부산행 열차에 탑승 중이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승객 중 한 명이다. 이곳엔 대략 천 명쯤 될까? 아니 팔백 명? 알 수 없다. 그런 정보는 나에게 지금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지금 이 열차에 탑승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의 주인공인 와트니는 첫 장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I'm pretty much fucked.
That's my considered opinion.
Fucked.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소설 《마션》의 첫 문장


나는 지금 지옥으로 향하는 중이다. 부산행 열차는 대체로 그렇게 흘러가는 편일까? 뭐, 그런 정보 역시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사실은 내가 좆됐다는 사실이다.


쾌속으로 달리는 지옥행 열차 안에서 나는 새삼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반복되며, 담론으로서의 인류가 가진 삶의 의미, 그것이 영속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 고찰은 아마도 결론으로 치닫지 못할 테지만... 결론을 얻기 전에 내 생명이 먼저 말살될 확률이 높으리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채 1 시간? 혹은 30분쯤이라는 사실이 슬픔을 더 슬픔답게 만든다. 슬픔은 슬픔에게, 스스로 이 나약한 마음의 심지에 기름진 토양을 일구도록 마지막 책무를 맡겨야 할 텐데, 나는 지금 슬픔을 스스로 정의하려 든다. 슬픔을 홀로 겪는다는 것, 그 슬픔이 더 큰 고난을 겪게 될 거라는 사실이 더 슬픔을 짙은 어둠으로 칠할 뿐이다.


이상하다. 왜 나는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고 있을까. 죽음이 임박한 이 순간에 나는 슬픔이 발산하는 모든 감정들의 실타래 같은 촉수들을 하나하나 받아들이고 흡수하려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작용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나는 감정이 없는 동물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감정을 인위적으로 내 몸에서 분리해낸 상태다. 자의적으로 내 책임하에 그런 일이 실험적으로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부산행에 탑승한 한 명의 승객으로서 또 다른 승객을 예우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 그냥 가정인 것이다. 미안함을 애써 표현하고 싶은 어떤 간절함의 표시일 것이다.


하지만, 양해해달라는 말은 못 하겠다. 단순한 고백 혹은 고해성사 정도라고 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뿐더러, 죽음을 앞은 인간이 어찌 처량하게 목숨 따위를 구걸하며 구차하게 살아보겠다고 이 칸 저 칸으로 부리나케 뛰어다니겠는가.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을 처연하게 기다릴 수밖에.


한 가지 사실을 더 고백하자면, 나는 이번 아포칼립스를 일으킨 바이러스의 설계자이자, 개발자다. 그러니까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 중 하나라는 거다. 그래서 내 몸으로 실험을 자행한 것이다. 바이러스와 유사한 형태의 약물을 직접 편도체에 주입했지만 기묘하게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엔 분노가 다소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니까 인류가 바이러스에 점령당할수록 분노는 오히려 가라앉았다.


나만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임을 어떻게 지면 될까? 목숨이라도 내놓으면 되는 걸까? 이미 여기서 목숨을 잃게 될 텐데. 그런 작은 목숨 따위가 무슨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그 약물은 심각한 바이러스가 된 걸까?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인류가 멸절될 위기에 처하게 될 거라고는 고려하지 않았다. 예측한다고 그런 걱정 때문에 연구를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학은 수없이 많은 희생을 통해서 진보해왔으니까. 우리는 그런 사명감 하나로, 적잖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실험실 바깥으로 누출되지 말았어야 하는 바이러스가 저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단 0.000001 %의 확률을 가진 실수 덕분에 그렇게 됐다.


백신? 백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연구할 연구진조차 대부분 좀비가 됐으니까. 나는 그들이 서로를 원수처럼 물어뜯고 뜯기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바이러스는 분노를 극대화하는 것 같다. 연구에 따르면 바이러스가 감정을 다루는 편도체의 특정 부분을 활성화시킨다고 하는데, 아마도 바이러스는 숙주의 편도체 중에서도 분노를 담당하는 영역을 지나치게 활성화시키는 것 같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감염자는 자신의 어머니나 아들, 딸까지도 감염시키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들은 대체로 감정의 기능을 상실한다. 오직 분노의 감정 하나 만을 남겨두고 다른 기능은 사라지는 것이다. 백사장에 찍힌 내 발자국들을 파도가 단 한순간에 쓸어버리듯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 감염된 자들은 인류가 오래도록 이 행성에서 생존하도록 도와준 감정의 역사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다. 그 전염병을 약화시킬 방법도, 진압할 방법도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도망친다 해도 갈 곳은 없다. 그래봤자, 이 행성의 또 다른 끝일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삶이 늘어나겠는가. 탄력 있는 고탄성의 고무줄도 아니고, 삶은 무력하게도 막을 내리고 말 것이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탑재된 헤드폰을 귀에 꼽는다. 그리고 생상의 백조를 듣는다. 물론 이 연주는 무한 반복될 것이다.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동고동락할 것이다. 외롭게 될까?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꺼낸다. 그리고 성 어거스틴이 시간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떠올린다.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그냥 시간에 내 분신이 하나 얹혔을 뿐이다. 이 시간도 무덤에 잡초가 쌓이듯 무심하게 자라날 텐데, 나는 내게 남은 시간들에 대해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예측하기 곤란한 전개를 앞두고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qrKjywjo7Q&ab_channel=YoYoMaVEVO


내 손안에는 권총 한 자루, 1973년에 생산된 프랑스 제, 마뉘랭 MR 73 리볼버가 있다. 한 발이 장전된 방아쇠만 당기면 나는 당장 이 감옥 같은 행성, 지구에서 탈출할 수 있다. 트리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잠시 후, 탕!


한 발의 총성이 정확하게 들렸다. 들려? 소리가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지옥행 열차가 플랫폼을 통과하듯이... 정확하게 머리 한가운데를 관통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버젓이 살아있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여전히 생각이란 것을 하고 있다. 이것도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변칙적인 순간인 걸까? 아니면, 이곳이 부산행 열차에서 마지막으로 맞게 될 어떤 환희의 종착역 같은 곳일까?


왜 살아 있는 거야?


그래, 좀비는 죽지 않는다. 어쩌면 머리에 총상을 입어도 죽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내가 좀비라는 사실인가? 나는 연구실에서 분노를 활성화시키는 중추를 건드렸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어디서나 예외는 존재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감정을 다채롭게 느끼는 거다. 내 분노, 내 바이러스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구크리칼을 든다. 살아서 인류에게 마지막 희망이 될지도 모르는 나를 통해서 인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 죄를 갚는 일이다. 나는 살아서 이곳을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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